‘미래의 영국, 스코틀랜드.’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평이다. 영국의 잉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를 제치고 스코틀랜드는 이와 같은 찬사를 얻어냈다.영국의 북부지역 스코틀랜드의 인구는 약 500만 명. 영국 전체의 9%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이 적은 인구로도 스코틀랜드는 생명과학, 에너지, 항공우주, 식품·음료 등의 부문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일궈냈다. 특히 생명과학은 이 가운데에서도 돋보인다. 인슐린, MRI, 마취 시술, 복제양 돌리 모두 스코틀랜드의 작품이다. 기술 개발에 머무르지 않고 투자를 받아 이를 상용화하는 데 적극적이다.최근 국내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지역 홍보와 투자 유치에 팔을 걷어붙인 곳이 적지 않다. 국내 회사뿐만 아니라 해외 기업도 지자체의 타깃이 된다. 장소 마케팅과 펀딩에 능한 스코틀랜드를 벤치마킹해 보면 어떨까.처음 만난 영국 사람에게 영어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당신은 잉글리시(English)냐”라고 물어보면 큰코다친다. 영국 사람이라도 고향이 스코틀랜드일 경우 얼굴을 붉히며 “나는 스코티시(Scottish)”라고 강조하게 마련이다.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그만큼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강하다. 영국의 다른 지역인 잉글랜드와 웨일스, 북아일랜드와는 차별화하기를 바란다. 스코틀랜드라고 하면 ‘위스키’와 붉은색 ‘타탄체크’가 떠오르지만 알고 보면 ‘생명과학’ 또한 앞서 있다.현대 외과 의학의 창시자 존 헌터와, 마취 시술을 발명한 제임스 영 심슨, 인슐린으로 노벨상을 받은 존 매클라우드, MRI 스캔을 발명한 존 맬러드 모두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아울러 스코틀랜드의 로슬린 연구소는 복제양 돌리로 유명하다. ‘영국에서 발명됐다’고 여겨지는 기술의 상당수가 스코틀랜드의 토양에서 꽃피웠던 것이다.그렇다면 스코틀랜드는 어떻게 생명과학을 특화했을까. 여기에는 정부의 역할이 컸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1999년 자치권을 이양받아 스코틀랜드 행정부(Scottish Executive)라고 불린다. 그 뒤 자체 의회를 갖췄고, 에든버러를 수도로 삼았다. 스코틀랜드 의회에는 보건, 교육, 환경과 같은 자치권 관련 법률을 통과할 권한이 있다. 스코틀랜드 정부가 관리하는 예산만 연간 300억 파운드(약 55조 원)다.스코틀랜드 정부는 경제 개발에 보다 힘을 싣기 위해 국내에는 생소한 개념의 공기관을 설립했다. 정부기금으로 운영되는 스코틀랜드 경제개발공사(Scottish Enterprise)는 경제 발전을 위해 사업과 인력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스코틀랜드 행정부는 이어 아예 투자 유치를 전담으로 하는 산하기관을 만들었다. 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Scottish Development International)을 2001년 출범한 것이다. 운영은 스코틀랜드 행정부와 경제개발공사가 공동으로 맡고 있다. 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은 외국인 직접 투자(FDI)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스코틀랜드 기업의 해외 비즈니스를 돕고 스코틀랜드에 투자한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세계 각국에 사무실까지 두고 있을 정도다. 한국에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 한국 사무실이 있다. 장헌상 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 한국 대표는 “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은 새로운 시장, 투자처, 기술, 제품 등의 창구를 개척하고 있다”면서 “또한 스코틀랜드의 대학과 해외 기업체들이 특허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설명했다.스코틀랜드가 생명과학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배경으로 ‘클러스터’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 말 스코틀랜드 경제개발공사는 바이오 기술, 에너지, 식품, 음료, 정보 산업, 부가 가치 엔지니어링, 멀티미디어, 관광, 섬유, 화학, 교육 서비스, 임산업 등 12개 분야에 클러스터 방식을 도입했다. 스코틀랜드 경제에 미치는 중요성과 성장 잠재력, 국제 경쟁력 등을 기준으로 12개 분야를 채택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와 글래스고, 에버딘, 던디 등에는 생명과학으로 특화된 탄탄한 클러스터를 운영 중이다.생명과학은 이와 같은 클러스터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받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인구는 영국 전체의 9%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영국 유전자공학 석사 학위 보유자의 31%, 미생물학 박사 학위 보유자의 30%가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생명과학 클러스터에는 존슨앤드존슨, 글락소스미스클라인, 오가논, 와이어스, 비라젠, 찰스 리버 래보러토리즈, 인비트로젠 등 글로벌 기업이 다수 포함돼 있다.스코틀랜드에만 590여 개의 생명과학 기업이 활동 중이고, 2만9500명이 관련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의료보건 분야에서 특화된 경쟁력을 보인다. 생명과학 기업 중 70% 이상이 의료보건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아울러 2005년 당시 유럽에서 기업공개(IPO)를 한 생명과학 기업의 20%가 스코틀랜드 업체였다.클러스터가 활성화돼 있다 보니 영국의 다른 지역에서 스코틀랜드로 찾아오는 학자도 있다. 당뇨병 연구로 저명한 마이크 애시포드 던디대 의과대 교수는 “케임브리지대에서 10년간 일했지만 생명과학 클러스터의 수혜를 보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옮겼다”고 말했다.스코틀랜드 정부는 생명과학 클러스터 지원을 위해 독특한 기관을 신설했다. 바로 ‘중간기술연구소’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ITI(Intermediary Technology Institute)다. ITI는 미래 시장을 미리 예측, 스코틀랜드 기반의 연구개발(R&D)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반민영 투자회사다.ITI 산하에도 분야별 사업부가 있다. 이 가운데 생명과학을 맡은 곳은 2004년 설립된 ‘ITI 생명과학(ITI Life Sciences)’이다. 짐 그리브스 ITI 생명과학 마케팅 이사는 “ITI는 초기 단계에 있는 R&D활동이 상품화돼 비즈니스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그 중간 ‘가교’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연구자가 벤처 캐피털의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 준다”면서 “대신 R&D의 지식재산권은 ITI가 소유해 ITI 나름의 수익 모델을 창출한다”고 덧붙였다. 중간 다리 역할을 해주는 만큼 ITI의 직원들의 교육 수준도 높다. ITI 생명과학의 경우 직원의 90%가 박사 학위 또는 MBA(경영학 석사)를 취득했다. 시장에서 기회를 찾고, 벤처 캐피털의 자본을 끌어오기 위해 ‘마켓 애널리스트’라는 직종도 ITI에 있다. 이들 가운데 쟁쟁한 이력을 갖춘 사람이 적지 않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의 컨설턴트 출신, 글로벌 회계 법인 어니스트&영의 전직 회계사 등이 활동 중이다.한국과의 교류도 적극적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은 한국의 생명과학 학계·업계와의 교류를 위해 2001년부터 본격적으로 뛰어왔다. 그 결과 한국보건산업진흥원과 스코틀랜드 경제개발공사가 2002년 바이오 산업 분야에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2004년에는 아예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유럽 본부가 독일에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로 이전했다. 아울러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국내 기업의 신약 개발 국제화를 목적으로 2004년 신약 개발 국제협력연구사업을 시작했다. 진흥원은 이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기업과 스코틀랜드 연구기관 간의 협력 연구 과제에 연간 10억 원씩 지원하고 있다.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제4회 한국·스코틀랜드 생명과학 포럼’에 참석한 이용흥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원장은 “생명과학 선진국인 스코틀랜드와의 협력을 통해 국내 신약 개발과 줄기세포 연구의 기술 경쟁력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국내 기업도 2000년대 들어 스코틀랜드와 손을 잡고 있다. LG생명과학은 스코틀랜드 애버딘대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2005년부터 9년간 총 180억 원 규모의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 프로젝트를 공동 진행하게 됐다. 대웅제약 또한 스코틀랜드 업체인 햅토젠(Haptogen)과 9년간 180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2005년 착수했다. 항체 기술을 사용한 감염 치료제 개발 프로젝트다.신약을 스코틀랜드 회사와 공동으로 개발하는 한국 기업도 있다. 종근당은 2005년 스코틀랜드 바이오메디컬(Scottish Biomedical)과 계약하고 신약을 개발하고 있다. 총 120억 원의 연구 자금을 들여 신진 대사 질병(특히 당뇨병) 분야의 신약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이를 위해 종근당은 국내 연구원을 스코틀랜드 현지에 파견하기도 했다. 안순길 종근당 종합연구소장은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것도 계약 체결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스코틀랜드는 한국에서 열리는 대규모 바이오 기술 전시회인 ‘바이오 코리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04년부터 바이오 코리아 행사 기간에 ‘한국·스코틀랜드 생명과학 심포지엄’을 개최하며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INTERVIEW / 토니 베이커 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 생명과학 단장5년간 2배 성장 … 투자 ‘대성공’“스코틀랜드가 최적의 투자 대상지입니다.”토니 베이커 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 생명과학 단장은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그는 “스코틀랜드의 우수한 학문적 역량, 혁신적인 연구, 숙련된 노동력 등의 요소가 결합해 투자 유치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설명했다.실제로 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까지 만들며 투자 유치에 열을 올린 스코틀랜드는 톡톡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05년에는 국제개발청 설립 초기에 비해 투자 금액이 두 배로 증가했다. 2억1500만 파운드(약 39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 스코틀랜드로 유입됐다.이와 같은 성과를 두고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유명 비즈니스 자문사인 GDP 글로벌 디벨로프먼트는 2005년 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을 ‘세계에서 가장 일관성 있게 고도의 실적을 내는 기관’으로 지칭했다. 전 세계 178개의 투자 유치 기관을 조사한 뒤 내린 평가다.베이커 단장은 “스코틀랜드의 생명과학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급성장했다”면서 “생명과학 관련 기업 수와 생명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인구가 2배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스코틀랜드국제개발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20 비전’이라는 전략을 세우고 혁신적인 생명과학 비즈니스 모델 개발과 재정 지원에 힘쓰고 있다”고 덧붙였다.INTERVIEW / 이안 윌머트 에든버러대 교수국익 차원 규제완화 ‘큰 도움’에든버러대에는 스코틀랜드 생명과학의 상징적 인물이 있다. 바로 이안 윌머트 에든버러대 의과&수의학대 교수다. 복제양 돌리와 줄기세포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그는 “돈으로 경쟁한다면 미국을 따라잡을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스코틀랜드 정부가 생명과학 분야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결과 글로벌 경쟁력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줄기세포 연구에는 윤리적 논쟁이 늘 뒤따르게 마련이다. 한국에서는 ‘체세포 복제 배아줄기세포 연구’ 허용 여부 문제가 찬반양론에 휩싸인 뒤 연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방향으로 지난 3월 결론지어졌다. 이에 대해 윌머트 교수는 “스코틀랜드는 일찌감치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를 허용하는 등 국익 차원에서 규제를 완화했다”고 설명했다.스코틀랜드는 줄기세포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에든버러대에 스코틀랜드 재생의학센터(SCRM)를 세우기로 했다. 2010년 완공될 SCRM 설립 비용은 1억1400만 달러(약 1056억 원)에 달한다. 첨단 시설을 갖춘 이 건물은 220명의 연구자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에든버러대 재생의학센터장을 맡고 있는 윌머트 교수는 한국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다. 지난 4월 25일에는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한국의 ‘과기부 21세기 프런티어 연구개발사업 세포응용연구사업단(이하 세포사업단)’과 국제 공동 연구 협력 기반을 마련했다. 앞으로 에든버러대와 한국 세포사업단의 연구자가 소속된 대학 간의 이수 과목 학점을 상호 인정하기로 했다. 아울러 두 기관의 연구자들의 상호 방문과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줄기세포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스코틀랜드 = 이효정 기자 jenny@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