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벼 먹는 돈가스’로 대박 일궈
최근 주목받는 키워드 중 하나가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이다. 2006년 6월 <와이어드> 매거진에 제프 하우(jeff howe)가 처음 언급한 크라우드 소싱은 대중과 아웃소싱의 합성어로 일반 대중이 기업의 생산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쉽게 설명하자면 기업은 먼저 생산할 제품의 디자인을 인터넷을 통해 공모한다. 그런 다음 공모된 디자인을 다시 웹사이트에 공개해 소비자에게 직접적인 구매 의사를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최종적으로 소비자 반응 조사가 탁월한 디자인만 선택해 제조, 판매하는 방식이다. 즉 디자인 공모부터 소비자가 직접 참여하므로 재고 등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으며 판매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가 외국에서만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10년 전 한국의 남대문에서도 크라우드 소싱은 시작됐다.남대문 최고 인기 메뉴 개발1997년 어느 날, 서울 남대문거리에선 인근 직장인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설문 조사가 실시됐다. 한 음식점이 시행한 이 설문 조사는 이미 1주일 전 시행된 1차 설문 조사를 통해 만든 신메뉴 출시를 앞두고 2차로 소비자 반응을 점검하는 설문 조사였다. 1차 설문 조사의 주요 내용은 직장인이 점심때 주로 이용하는 식당과 메뉴, 그리고 메뉴의 특징 및 장점과 가격대를 평가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2차 설문 조사는 여성 고객의 선호도가 높은 돈가스에 대한 수요 조사가 목적이었다.2차 설문 조사 당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비벼 먹는 돈가스’ ‘속풀이 해장 돈가스’ 라는 새로운 메뉴였다. 이해하기 힘든 메뉴를 본 소비자는 ‘대략 난감’하긴 하지만 재미있는 설정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2차 설문 조사를 마친 한 달 뒤 남대문에는 ‘비벼 먹는 돈가스’가 실제로 등장했고 인근 직장인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이 독창적인 메뉴를 개발한 장정원 비돈치 사장(57)은 작은 시도가 얼마나 큰 혁신을 이룰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다. 1996년 남대문시장에서 등산 용품 도매업으로 잘 나가던 장 사장은 사업 확장의 일환으로 외식업에 손을 댔다. 개점만 하면 돈이 된다던 P제과점을 남대문에 열었지만 장 사장만은 예외였는지 영업 부진에 시달리다 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제과점의 실패는 시련을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등산 용품으로 전국 백화점에 납품하며 호황을 누리던 도매업마저 파산하기에 이른다.당시 남은 것이라곤 망해버린 제과점 점포 하나. 이곳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자본이 없기 때문에 이전처럼 유명 브랜드를 선택하기도 힘들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만 했다. 외식업에 문외한이었던 장 사장은 자신을 채찍질하며 음식과 관련된 서적을 모두 구입해 탐독하기 시작했다. 당시 읽은 책이 족히 100권은 넘는다고 한다. 밤낮없이 읽고 연구하기를 거듭한 결과 한국인에게 맞는 메뉴 개발을 떠올리고 개발한 것이 ‘비벼 먹는 돈가스와 김칫국’이란 한국형 퓨전 돈가스 ‘비돈치’였다.비결은 ‘메뉴의 재구성’재기에 대한 신념으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 ‘비돈치’가 탄생했다. 직장인을 위해 개발한 속풀이 돈가스(돈가스+김칫국+비빔밥)와 비벼 먹는 프라이팬 돈가스는 한국형 돈가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비돈치’는 손님들의 취향을 고려해 돈가스를 비벼 먹고 철판에 데쳐 먹고 국물에 끓여 먹을 수 있는 등 다양한 퓨전 메뉴를 선보였다.이와 같은 한국형 돈가스의 개발은 의외로 단순한 데서 착안됐다. 서양 음식 포크 커틀릿(pork cutlet)이 일본에 들어오자 일본인은 자신들에게 맞게 돈가스라는 새로운 메뉴로 재탄생시켰듯이 일본식 돈가스도 한국에 들어와서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한국인의 식탁엔 김치가 있어야 한다는 점과 일본식 미소장국 대신 김칫국이 한국인에 입맛을 더욱 좋게 해 준다는 점, 그리고 한국인은 비벼 먹는 문화에 익숙하다는 점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재구성한 것이 오늘날의 ‘비돈치’다.장 사장은 강남역 인근에 비돈치를 처음 열던 때도 과거와 같은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던 ‘비돈치’였지만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도전이었기에 ‘비벼 먹는 돈가스’에 대한 소비자 호응도를 조사했다. 똑같은 설문 조사였지만 과거와는 목적이 달랐다. 과거엔 소비자 수요 조사가 목적이었다면 이번엔 사전 홍보가 목적이었다. 소비자에게 먼저 상품을 알려 사전 기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함이었다. 2005년 강남역 극장 뒷골목에 개점한 비돈치 매장 안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젊은 직장인으로 가득 차 있다.장 사장의 성공 요인은 젊은 여성을 타깃화한 소비자 수요와 차별화된 메뉴 콘셉트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 중심의 소비자 수요 조사를 통한 사전 설문 조사에 있다고 봐야 한다. 사전 설문 조사는 크라우드 소싱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임을 명심해야 한다.특히 눈여겨봐야 할 점은 돈가스를 단지 그대로 재연하지 않고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오리지널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별로 다시 창조되고 재구성되는 것일 뿐”이라는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의 말은 패션계에만 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타 산업에도 영향을 미쳐 최근 들어 일고 있는 베이커리와 커피숍의 외식 업계의 업종 통합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편의 업종 중에서도 편의점과 약국이 통합 운영되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향 역시 패션에서 시도된 믹스 앤드 매치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외식업도 기존의 메뉴를 재해석한 퓨전화, 크리에이티브한 메뉴들이 새로운 키워드로 등장하고 있다. 서로를 믹스 앤드 매치하고 이들을 또 최신 트렌드로 발전시켜야 한다.장 사장이 이룬 성공적인 혁신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장 사장은 지독한 편집광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혁신을 이뤄내는 여러 요인 중 으뜸은 개선에 대한 의지다. 장 사장은 꾸준히 한 가지에만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개선한 결과 오늘날의 혁신을 이뤄냈다. 메뉴 개발, 품질 향상, 비용 절감 등 작은 문제라도 발견해 개선해 온 결과가 지금의 장 사장을 만들었다. 그는 즉 ‘개선 편집광’이다. 혁신은 개선에 대한 끊임없는 의지에서 비롯됨을 명심하자.혁신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새로운 것이라는 고정관념이다. 혁신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뒤섞고 흔들어 보다 때로는 걸러내고 덧대는 과정에서 재탄생되는 것일 뿐이다. 인간사를 살펴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란 사실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사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다 준 불의 존재도 본래 있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성서에서조차 ‘태양 아래 새것이 없다’고 단정 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혁신이란 소비자에 맞게 재구성한 것을 실행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장 사장은 남대문 시절 ‘남대문에서 가장 맛있는 집’으로 선정됐을 때를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음식은 맛도 중요하지만 맛있으면서 기억에 남는 음식을 만들고 더 나아가 고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음식을 만들고자 하는 신념이 오늘날의 ‘비돈치’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장 사장의 성공 포인트는 한 가지를 더한 것이다. 맛은 기본, 여기에 한 가지 더 ‘기억에 남는 메뉴’다. q고경진·스타트창업센터 소장 www.startok.co.kr©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