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한 삶 실천… ‘이용후생’ 앞장

‘한두 잔 막걸리로 혼자서 맘 달래노라/백발이 성글성글 탕건 하나 못 이기네/ 천년 묵은 나무 아래 황량한 집에/한 글자 직함 중에도 쓸데없이 많은 능관일레/맡은 일 쥐 간처럼 하찮아 신경 쓸 일 적다만/그래도 계륵처럼 내버리긴 아깝구려/만나는 사람마다 지난겨울 고생했다 하는데/ 마침 재실에서 지내니 되레 추운 줄 몰랐다오.’연암 박지원(1737~1805)이 쓴 ‘계륵같은 관직(齋居)’이라는 시다. 연암은 백발이 성글성글한 나이 50세에 선공감 감역이라는 종9품의 미관말직을 받고 벼슬길에 올랐다. 연암은 당시 홍대용 박제가 등 당대의 실학파들로 연암파를 형성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요즘의 9급 공무원에 임명된 것이다. 그의 평생지기로 우의정을 지낸 유언호가 천거한 결과였다.연암은 젊은 시절 과거시험을 보기도 했지만 벼슬길을 단념하고 만다. 그의 문장이 뛰어나 당시 임금인 정조까지 관심을 보였지만 35세에 과거에 미련을 접었다. 이때부터 그는 가족을 처가에 보내고 서울에 셋방을 빌려 기거하며 실학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나갔다. 그렇다고 궁핍한 생활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늘 지인에게 돈을 좀 빌려달라는 ‘척독(尺牘: 우회적 표현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짧은 편지글)’을 쓸 정도였다.가난에 초연했던 연암이 돌연 관직에 오른 것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즉 연암이 9급 공무원이 된 것은 무엇보다 밥벌이의 절박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가난한 살림살이로 부인인 전주 이씨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연암은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아내의 몰골이 너무 불쌍해 혼자 눈물짓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는 고생하는 부인을 위해 남들의 비웃음을 살 정도인 미관말직을 받아들이지만 반년도 못돼 부인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연암은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조부(박필균)가 관찰사와 대사간을 역임했고 5대조인 박미는 선조의 부마(사위)였다. 박미의 부친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신 공으로 금계공에 봉해진 박동량이다. 이로 인해 연암 가문은 조선 후기 집권파였던 노론 계열에 섰고 수많은 공직자들을 배출했다.외척이었던 연암가는 척신의 혐의를 피하고자 근신하며 청렴한 생활을 했다. 부친 박사유는 평생 백면서생으로 살았다. 그래서인지 2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연암은 어린 시절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못했다. 그가 공부를 시작한 것은 16세 때 전주 이씨와 결혼하면서부터다. 연암이 글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안 장인이 직접 <맹자>를 가르쳤고 자신의 동생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연암은 실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열하일기>를 쓴 당대의 문장가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여전히 가난했다. 그 가난 때문에 뒤늦게 관직에 나간 연암은 이후 사복시 주부, 사헌부 감찰, 제능령을 거쳐 55세 되던 해에 한성부 판관을 역임한 후 안의현감이 됐다. 64세 때 양양부사로 승진했다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종9품 최하위직에서 시작해 종3품까지 이르렀다. 14년 동안의 공직생활 내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연암의 생애를 접하면 자녀 교육비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가장의 모습과 중첩돼 더욱 애잔한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실용과 혁신으로 표상되는 연암의 사상과 문학이 그가 죽은 지 200여 년이 지난 ‘지금-여기’서 현재진행형으로 살아있는 것은 너무도 인간적인 그의 삶 때문이 아닐까.<주역>에서 큰 성공(大畜)의 조건으로 ‘불가식(不家食)은 길(吉)하다’고 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하면 결국에는 길하다는 풀이다. 이는 반대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만 급급한 사람이라면 결코 큰 성공을 거둘 수 없고 흉하다는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가족 챙기기에만 급급하다. 주역에서 말하는 ‘소인(小人)’의 삶이다.기업도 마찬가지다. 재벌 회장조차 자식이 폭행을 당하자 일개 조직폭력배와 같이 보복 폭행에 나섰다고 한다. 자식 앞에 눈먼 재벌 회장이라면 소인이나 다름없고 결코 대축을 이룰 수 없다. 연암이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어쩌면 ‘불가식 정신’일 것이다. 가난 때문에 늘그막에 공무원이 됐지만 청빈하게 살며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이용후생’에 매진했던 것이다. q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