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5일 경기도 화성시의 현대자동차 남양연수원에선 이례적인 행사가 열렸다. 17개 해외법인장과 지역본부장, 해외영업담당 임원들이 모두 참석해 수출 총력 체제 구축 결의대회를 가진 것. 원화 강세로 인한 가격 경쟁력 하락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고 이의 실천을 다짐하는 자리였다.최근 몇 년 사이 글로벌 시장에서 ‘다크호스’로 주목받고 있는 현대차. 하지만 실상은 사실 ‘위기’에 가깝다. 안에서는 노사관계가 불편하고 밖에서는 환율이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최대 경쟁자인 일본 업체들은 엔화 약세로 수출의 호기를 잡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 시장에선 현대차와 일본 차의 가격 역전 현상까지 벌어진 바 있다.환율이 기업 경영의 핵심 이슈로 등장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환율은 수익성을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최근 환율에 대한 관심은 남다른 면이 있다. 손익 분기점마저 위협할 정도로 급락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해의 경우 유독 원화만 ‘나 홀로 강세’를 보이며 국제 경쟁력을 크게 떨어뜨렸었다.실제로 지난해 무역협회 무역연구소가 국내 기업의 해외 현지법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상당수의 기업이 환율 하락으로 채산성 악화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48.1%의 기업이 ‘마진이 거의 없다’고 답했고 이미 적자로 돌아선 기업도 12.7%나 됐다. 특히 엔화 약세로 가격 경쟁력이 크게 강화된 일본 시장에서 심각한 부진을 겪고 있었다. 무려 75%의 기업이 마진이 없거나 적자 상태라고 응답한 것이다.그렇다면 올해 환율은 어떻게 움직일까. 연말 연초 정부와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일제히 원화 강세가 지속될 것이란 ‘우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글로벌 달러의 약세가 이어질 것이란 이유에서다. 기업들도 사업 계획상의 기준 환율을 보수적으로 정했다. 일종의 배수진을 친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연초 환율은 전문가들의 전망을 배신하고 상승 기류를 탔다. 지난해 말 920원대이던 것이 940원대로 올랐다. 하지만 상승세가 오래 지속될 것이란 데에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회의적이다.삼성경제연구소의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세계적으로 엔·달러가 상승한 점, 국내적으로 해외 투자 활성화 등 정부의 외환 안정화 대책에 대한 심리적 기대가 원·달러를 끌어올린 요인이었다”며 “하지만 예상보다 다소 지연되고 있긴 하지만 글로벌 달러의 약세 가능성이 여전히 높아 중·장기적으로 환율 상승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엔·달러의 추가 상승 가능성이 희박한 점도 원·달러 환율 상승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최근 원화가 약세를 면치 못하던 엔화의 강세 반전으로 상승하긴 했지만 엔화는 이미 오를 만큼 올랐기 때문에 머잖아 다시 하락세로 돌아설 것이란 견해다. 일본이 금리를 대폭 올릴 경우 전혀 다른 상황이 올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다는 얘기다.근본적 해결책은 생산성 향성외환은행 이준규 외환운용팀 과장은 “단기적으로 최근 환율 상승은 수출업체들의 네고 물량과 외국인의 달러 매수 물량 간의 수급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라며 “이미 나온 네고 물량이 소진된 후 환율이 더 오르기 위해선 또 다른 이벤트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이어 이 과장은 “1분기에 환율이 최근의 추세를 이어지겠지만 그 후엔 하락세로 돌아선 후 다시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큰 변수가 없는 한 원·달러 환율이 크게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환 리스크 관리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한경비즈니스>가 국내 10대 제조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상당수의 기업들이 사업 계획상의 기준 환율을 시장 예측보다 낮게 잡은 것으로 나타났다.10개 기업 중 4곳이 기준 환율을 900원으로 책정했다. 900원은 국내 경제연구소들의 예측치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925원, LG경제연구소가 910원, 한국금융연구원이 925원, 국민은행연구소가 925원, 외환은행이 915원,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925원이 연초 예상 환율이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기업들의 위기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기업들의 환 리스크 관리는 환 헤지, 결제 통화 다변화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내부에 전문 인력과 관리 시스템을 두고 탄력적으로 헤지 물량과 시기를 조절하는 동시에 달러화 중심의 결제 통화를 유로화 등으로 분산해 달러 약세 리스크를 줄이고 있다.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환 리스크에 대한 본질적인 해결책은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박춘호 심플렉스 한국대표는 “같은 환율, 같은 업종에서도 어떤 기업은 수익을 내고 어떤 기업은 손실을 내는데 그 이유는 생산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며 “기본적으로 환율 변동에 따른 리스크는 생산성 향상으로 커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기업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격화되는 글로벌 경쟁 구도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궁극적으로 보다 확고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1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기업들은 환 리스크 대응책으로 제품의 고부가가치화, 비용 절감, 경쟁력 강화 등을 내놓았다.사실 환율이 떨어지는 만큼 가격을 올릴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하지만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 환율이 올라도 가격은 제자리걸음을 유지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품질이 엇비슷한 상태에서 경쟁사에 밀리지 않기 위해선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진 축소를 감수해야 한다. 실제로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환율이 10% 오를 때 국내 제조사들의 수출 가격은 겨우 4% 인상에 그친다. 6%의 마진이 사라지는 것이다. 환율에 대한 최상의 수는 역시 경쟁력 강화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