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 가풍으로 위기 딛고 ‘연착륙’
굴뚝기업의 대명사였던 GE는 단순한 제조회사가 아니다. 냉장고 등을 판매한 수익금보다 더 많은 이윤을 금융부문에서 창출하고 있다. GE는 제조회사에 머무르지 않고 금융회사로 그 영역을 확대한 것이다.GE의 매출액은 금융 제품 서비스 순이다. GE는 이제 제조회사가 아니라 금융회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즉 GE는 기업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추가하면서 업종 간 ‘융합’이라는 최근의 글로벌 추세를 선도해가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GE는 이른바 ‘업종 융합’을 통한 ‘연착륙(soft landing)’에 성공한 대표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대기업이 업종 융합에 나서는 것은 기존의 사업 모델로는 성장 동력에 한계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GE의 변신 비결은 잭 웰치라는 최고경영자(CEO)의 리더십에서 찾을 수 있다.역사상 명문가들도 때로는 세계적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업종 융합’에 나서는 경우가 있다. 고산 윤선도(1587~1671)를 배출한 해남윤씨가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고산가는 당쟁이라는 정치적 외부 요인에 의해 3번이나 유배를 당하는 등 가문이 위기에 처하자 대대적인 가풍 재정립에 나서게 된다. 과거시험을 통해 중앙 정계 진출로 입신양명과 가문의 발전을 꾀하던 고산가는 이를 멀리하고 대신 사대부가 멀리한 문인화를 수용했던 것이다. 전통 양반 가문이 새로운 신규 업종(문인화)을 도입해 가문의 활로를 찾았던 것이다.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17세기는 전란과 함께 당파 싸움이 극에 달했던 때였다. 고산은 30세에 광해군 당시 최고 권력자 이이첨의 죄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당한다. 당시 고산이 소를 짓고 그 피해가 관찰사였던 부친 윤유기에게도 미칠 것을 미리 알고 먼저 보여주었다. 이에 윤유기는 울면서 만류하다가 결국 자식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예측한 대로 부친도 자식의 귀양과 함께 삭탈관직당해 불운한 여생을 보내야 했다.윤선도는 벼슬에 올라있던 기간이 9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유배생활은 14년이 넘는다. 유배와 은둔의 파란만장한 삶을 산 고산은 죽음을 앞두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말라. 혹 인연이 닿아서 벼슬자리에 오르더라도 그 자리에 연연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그런 탓에 윤선도가 작고한 이후 고산가는 권력을 멀리했다. 이는 공재 윤두서에 이어 윤덕희, 윤용 등 3대에 걸친 문인화가를 배출하게 된 숨은 이유가 됐다. 문인화가의 길은 일반 사대부들이 가는 길이 아니었지만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고산가는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길을 갔던 것이다.고산가의 이른바 ‘박학(博學)’ 가풍은 고산에서 비롯됐다. 고산은 11세 때 산사에 들어가 책을 읽었으며 특별히 어느 스승으로부터 배운 바가 없었다. 대부분의 명문가들이 학자를 모시고 과외를 하는 게 관례였지만 고산은 독학했다. 이는 다른 명문가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또 당시 유학자들이 천시하던 병가(兵家) 의약 역학서 천문산법 복서(卜筮) 음양 지리 음악 음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이러한 ‘박학’의 가풍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해남윤씨가의 독특한 가학으로 전승된다.고산 가문에서 집안의 가학을 학문적으로 새롭게 융합해 가장 큰 성과를 이룬 사람은 공재 윤두서(1668~1715)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초상화로 유명한 공재는 학문도 높아 옥동 이서 등과 교유했으며 그의 아들인 낙서 윤덕희, 그리고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 등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고산 가문의 변신 비결은 가문의 CEO였던 고산에서 찾을 수 있다. 고산의 후손들이 고산이 제시한 실용 학문에 힘쓰면서 3대째 문인화가를 배출했다. 이는 고산이 제시한 실용적 가풍의 ‘연착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고산가는 위기에 처한 가문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실용적 가풍에 문인화를 접목하는 ‘업종 융합’을 이미 300년 전에 도입해 성공시켰던 것이다.글로벌 기업이라 해도 업종 융합에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GE처럼 기업도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잭 웰치와 같은 CEO가 없이는 자칫 경착륙(hard landing)을 유발시켜 덜컹거리면서 위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