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처럼 스며드는 소프트웨어 만들것’

“그동안 우리 제품을 개발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만, 납품을 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개발비용은 보상해드릴 테니 여기서 그만 포기하셔야겠습니다.”1999년 어느 날, 수원의 S전자 공장을 찾은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는 갑자기 날아온 통보에 말문이 막힌 듯했다.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어이가 없는 듯 탁자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유가 뭡니까.”“개발한 소프트웨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프랑스의 대형 통신장비 회사인 알카텔에 웹스크린폰을 팔려고 하는데 알카텔이 듣도 보도 못한 한국 벤처의 운영체제(OS)보다 미국 윈드리버 같은 대형 회사 OS를 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품에 하자가 있을 경우 아로마소프트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동원 가능한 인력을 모조리 투입해 날밤을 밥 먹듯 새워가며 만든 소프트웨어가 필요 없다는 통보였다.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벤처회사에 몸담은 지 2년째. 성공의 첫 단추라고 믿었던 첫 매출의 가능성이 단지 ‘회사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사라져 버렸다. 아로마소프트 임성순 사장(46)은 돌아오는 길에 “그만 회사를 접자”는 말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초기 멤버도 아니었던 그를 ‘믿을 만한 직장 선배였다’는 이유로 사장으로 모셔온 직원들에게 할 소리가 아닌 줄 알았지만 힘들고 외로웠다. 벤처에 왜 들어왔나, 공연한 후회도 스쳤다.1998년 설립된 아로마소프트는 이렇게 첫 매출을 올리는 데 실패했다. 이들이 다시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는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아로마소프트는 국내에서 한국 무선인터넷의 표준 위피(WIPI)를 개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모바일(휴대폰) 플랫폼 개발의 선두 업체다. 그러나 아로마소프트가 처음부터 모바일 플랫폼에 강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사업 초기에는 PDA와 셋톱박스 등 소형 디지털 기기에 들어가는 자바 기반의 OS를 주로 개발했다. 프로그래밍 언어인 자바는 타 언어에 비해 이식성이 뛰어나다. 어떤 하드웨어에도 탑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 있었다. “당시 일부 대기업이 이미 자바 OS를 내놓은 상태이긴 했지만 쌍방향 데이터 서비스나 실시간 운영체제가 전무해 시장성이 높을 것으로 봤다”고 임 사장은 회고했다. 1999년 무작정 PDA용 OS를 개발한 다음 닥치는 대로 제품 데모(성능 시범)를 하러 다녔다. S전자에서 시연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들은 웹스크린폰에 들어갈 데이터 서비스가 가능한 OS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벤처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아 기술이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쓰라렸죠. 임베디드 OS 분야를 포기하기로 하고 대기업들에 인수 의향을 물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더군요. 덕분에 지금 한국 제품에 들어있는 임베디드 OS는 거의 전부 외국 기업의 제품입니다.”하지만 전화위복이었을까. 이러한 경험을 겪으며 아로마소프트는 임베디드 OS 대신 모바일 플랫폼이라는 신천지에 눈을 돌리게 됐다. 2001년 중반 LG텔레콤과 손잡고 세계 최초로 휴대폰에 자바 플랫폼을 탑재하는 데 성공하면서 해외 진출의 계기가 마련됐다. 자바를 개발한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이하 썬)가 먼저 아로마소프트를 알아봤다. 썬은 이후 해외 시장 정보를 아낌없이 나눠주고 미국의 거대 이동통신사 스프린트에 아로마소프트를 소개해 주는 등 ‘영업 상무’ 역할을 자임했다.임 사장은 “썬은 우리가 주력하고 있는 휴대폰 미들웨어 플랫폼(휴대폰에서 문자 메시지나 게임을 구현하게 해 주는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퀄컴의 브루(BREW)와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동통신업체가 자바 기반인 우리 제품을 쓰면 쓸수록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면서 “덕분에 그 해 스프린트 측이 우리에게 먼저 연락해 왔다”고 설명했다. 당시 자바와 브루 중 어느 계열의 플랫폼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하던 스프린트는 ‘세계 최초로 휴대폰에 자바 플랫폼을 탑재했다는’ 아로마소프트의 기술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스프린트는 제품을 보고 두말없이 ‘OK’사인을 냈다.이후 회사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에서처럼 ‘이름값이 부족해’ 실패하는 일은 드물었다. 썬은 스프린트에, 스프린트는 소니 에릭손에 아로마소프트를 추천해 주는 식으로 입소문이 났다. 현재 아로마소프트는 LG전자와 팬택 계열의 수출용 단말기와 소니 에릭손, 교세라 와이어리스 단말기에 주력 브랜드 ‘mTea’를 탑재하고 있으며 이를 미국 스프린트·넥스텔, 유럽 H3G·오렌지·O2 등 전 세계의 20개 이동통신사에 공급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해외 이동통신사에 단말기를 공급하고 싶어 하는 한국 업체들은 으레 아로마소프트를 찾아와 ‘제품을 개발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이다.매출액과 영업이익도 크게 늘고 있다. 2003년에는 24억 원 매출에 영업이익이 7억 원 선이었지만 지난해에는 매출 41억7000만 원, 영업이익 17억5000만 원으로 2년 새 두 배 이상 성장했다. 영업이익률이 40%나 오른 것. 올해는 70억 원 매출에 25억 원의 영업이익을 예상하고 있다. “자바를 사용하면 썬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지만 자바 플랫폼이 세계 시장의 80~90%를 장악하고 있는 데다 호환성이 좋고 운영체제와 콘텐츠 사이에 존재하는 버추얼 머신(VM)이라 보안성도 뛰어나 사업 입지가 넓다”는 것이 임 사장의 설명이다.디지털 컨버전스시대 선도2004년에는 KTF계열사 지오텔 등과 함께 한국 무선인터넷 표준 위피를 개발하는 대형 성과를 일궈냈으며 지난 6월에는 미국의 디즈니모바일에 위치추적 서비스와 음성통화가 가능한 플랫폼을 개발, 공급해 주기도 했다.연구 인력을 포함해 총 47명의 벤처기업이 대기업보다 뛰어난 기술력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우문’을 던졌다. “기술을 향상시키지 않으면 대기업은 욕을 먹지만 중소기업은 죽기 때문이죠.” 간단히 답하는 임 사장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직장 후배가 아로마소프트의 사장을 맡아달라고 할 무렵, 삼성SDS 등 대기업에서도 제게 러브콜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그저 ‘프로그래머답게 마음껏 개발해 보다 안 되면 대기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아로마소프트를 선택했는데 막상 와 보니 도저히 떠날 수 없는 벤처만의 매력이 있었죠.”회사 이름을 아로마소프트로 지은 것도 특이하다. “썬이 ‘자바’를 브랜드로 채택한 것도 직원들이 자바 커피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커피 향처럼 어느 곳에든 스며들어 사용자를 안락하게 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자는 뜻으로 ‘아로마소프트’라고 지었죠.” 그는 “그런데 IT 전시회에 나가면 ‘아로마’라는 이름 때문에 향기가 나는 하드웨어를 만드는 회사인 줄 알고 바이어들이 명함 냄새를 맡아보곤 하더라”며 웃었다.그는 아로마소프트를 ‘삼성만큼 가고 싶은 회사’로 만들겠다고 장담한다. 회사 안에 카페를 만들고 우리사주를 진행하는 등 직원들에게 매출 성과를 돌려주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가 사람에 투자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최근 3년간 아로마소프트의 개발자 이직률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며 주요 핵심기술 인력은 창사 이후 단 한 사람도 회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아로마소프트는 내년 상반기 기업 공개(IPO)를 할 예정이다. 기업 공개가 원활히 이뤄질 경우 상반기 코스닥 시장 진입도 가능하리라 보고 있다. 임 사장은 “휴대폰 이외에 PMP나 MP3플레이어 등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미들웨어 플랫폼 ‘익스패논(ExpanOn)’을 곧 출시할 예정”이라면서 “지금까지 그랬듯 선도적 기술력으로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를 헤쳐나가겠다”고 강조했다.약력:1960년 서울 출생. 84년 중앙대 물리학과 졸업. 86년 중앙대대학원 전산학과 졸업 및 금성반도체 안양연구소 입사. 87년 LG소프트웨어 기술연구소(현 LG-CNS) 근무. 95년 LG소프트웨어 상품기획실장. 98년 아로마소프트 대표(현). 2006년 한국 무선인터넷솔루션협회(KWISA) 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