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볼 기회가 많지 않다. 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장면과 대사가 있다. 오래전에 보았던 ‘프리티 우먼(Pretty Woman)’은 매우 재미있었다.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리처드 기어는 냉철한 기업사냥꾼이었다. 그러나 한 여인을 만나고부터 냉혹한 기업사냥꾼에서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로 바뀐다는 것이 영화의 골격이다. 극중에서 리처드 기어는 어느 노신사가 운영하던 미국의 한 철강회사를 사냥감으로 요리한다. 당시에는 그냥 지나쳤지만, 10년도 안돼 진짜로 미국 철강기업들은 줄줄이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휩싸인다.영화는 시대를 예측하기도 한다. ‘프리티 우먼’의 경우 철강 기업이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등장한 것이 필자에게는 좀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우연이든, 시대의 맥을 짚었든 결과적으로 영화는 절묘하게 산업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최근에 한국에서 뮤지컬로 공연된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기억나는 영화가 있다. ‘풀 몬티(The Full Monty)’라는 영화다. 영화에서는 스트립 댄서를 지망하는 철강 노동자들의 웃지 못할 해프닝을 그렸다.영화의 배경이 된 셰필드라는 지역은 영국 산업혁명 시기에 철강 도시로 번영했던 도시였다. 이 지역은 1980년대부터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공장들이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거나 문을 닫았고, 결국 실업자를 양산하게 된다.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남자들이 스트립 댄서로 나선 것이 영화의 배경이다.30여년 철강 밥을 먹다 보니 ‘프리티 우먼’이나 ‘풀 몬티’가 말하는 감동보다 철강산업을 말하는 시각을 더 기억하게 됐다.철강산업과 맞물린 시대와 상황이 영화의 배경에서처럼 변했고, 지금도 역시 변해가고 있다. 철강산업은 유럽에서 산업혁명과 함께 꽃을 피웠으며, 미국이 헤게모니를 쥐었었고, 일본도 전성기를 보낸 적이 있다.현재는 중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헤게모니를 형성하고 있는 시기다. 거기에 더해 아르셀로-미탈 등과 같은 통합이 진행되고 있으며 치열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몇 년 전까지 철강 시황의 변동 주기를 짧아야 2~3년, 길게는10년까지 보았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갈수록 변동 사이클은 짧아져 최근에는 1년 미만으로 압축됐고, 급기야는 분기 단위, 월 단위, 주 단위로 시황 변동이 급박해졌다.그에 맞춰 한 철강사는 철강제품을 주문해 받아보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과거 30~45일에서 이제 15일까지 단축했다. 철강 제조 기술이 혁신적으로 바뀌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바로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를 높였기 때문이다.여기에는 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 중 하나인 ‘융합(fusion)’이 배경에 깔려 있다. 글로벌 경쟁과 전후방 산업의 환경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집중도를 높이고 있지만,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하며 바로 정보기술(IT)과의 융합이다.철강제품의 고객 응답 속도를 절반으로 줄이는 데 100년이 걸렸다면, 이제 그 한계에 도전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새로운 의미에서 철강산업에 불어 닥친 황의 법칙이 주는 압박이다.철강, 아니 중후장대 산업과 IT의 결합은 하드웨어의 결합 이상이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산업화, 전통성, 안정성, 남성미 등과 지식정보화, 혁신성, 미래지향성, 여성미에 이르는 기업 문화까지도 융합이 필요하다.영화의 배경에 IT가 잘 접목된 철강산업이 등장할 날도 멀지 않았다.김영철 동국제강 대표이사장1966년 서울 중앙고 졸업. 71년 연세대 기계공학과 졸업. 71년 동국제강 입사. 95년 건설본부 부본부장(이사). 98년 기술실장 겸 1, 2후판공장장. 2000년 전무이사. 2001년 3월 포항제강소장. 2003년 3월 부사장. 2006년 1월 대표이사 사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