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직업계 되살리는 ‘미다스의 손’

‘방직 업계의 마법사.’ 섬유 컨설턴트인 김경백 우림방적엔지니어링 사장(50)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 ‘섬유 컨설턴트’라는 명함을 가진 이는 그밖에 없다. “국내 방직업계에서 돈 받고 컨설팅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그의 말이 결코 부풀린 것이 아니다. 실제로 도산 직전의 여러 기업들이 그가 다녀간 뒤 기적처럼 되살아났다. 모 방직회사는 그에게 컨설팅을 의뢰했을 당시 ‘이미 끝났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순이익을 내는 알짜배기 회사로 탈바꿈했다. 이 외에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여러 회사들이 그의 손길이 닿은 이후 부활의 노래를 불렀다. 알다시피 섬유산업은 사양길을 걷고 있다. 이러다보니 그를 찾는 회사 최고경영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만 가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를 잘 모른다. 언론에 나서기를 극구 꺼리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성공이 그만의 노력으로 비쳐지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그가 섬유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대학원에서 고분자물리학을 전공하며 깊이를 더했다. 1983년 일신방직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일신방직은 기회의 땅이었다.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당시 사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기계 및 원료 구매, 기획, 재무, 공장생산관리 등 전 부문에 걸쳐 회사 개혁을 이끌었다. 특히 광주 2공장과 청원 1공장을 건립하며 자동화시설을 구비, 생산성을 눈에 띄게 높여 이후 일신방직이 전성시대를 구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그는 자동화기계를 직접 제작하는 데도 대단한 열성을 보였다. 그가 만든 ‘자동창고’의 경우 버튼만 누르면 로봇이 창고의 물건 진열까지 해결해 줘 비용 절감에 큰 도움이 됐다.원자재(원면) 구매도 그의 주특기 중 하나다. 업계에서는 그를 원면 구매의 최고 실력자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방직회사의 원면 구매 비용은 제조원가의 50~60%에 이를 정도로 비중이 높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저렴한 비용으로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원면수입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원면의 기술적 특성, 국제시황, 재고관리 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잘 나가던 그가 컨설턴트로 나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1989년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MBA(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 사표를 냈지만 김 회장의 반려로 휴직 상태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적이 있다. MBA를 마치고 1991년 복직했지만 1997년 다시 사표를 던졌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일신방직에 근무하는 동안 업계 최하위 그룹에 속했던 회사가 1990년대 중반 들어 국내 최고의 방직회사로 거듭났기 때문에 몸이 가벼워진 점도 한몫했다.그만두자마자 일이 쏟아졌다. 저가 면사에서 고급 면사 위주로 생산 구조를 바꾸려는 회사, 품질 저하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던 회사 등이 그의 컨설팅으로 기사회생의 길을 걸었다. 대한방직협회의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업계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뛰어들었다. 그 중 하나는 그가 갖고 있는 원자재 구매 노하우와 공장 운영기술 등을 매뉴얼화하는 작업이었다.기존 컨설팅사 근무 경험이 전혀 없는 그가 국내 방직업계의 독보적 컨설턴트로 올라선 비결은 뭘까. 그는 3가지 조건을 들었다. 실무경험이 풍부하고, 세계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정확한 경영 판단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계 거의 모든 기계전시회를 돌아다니며 영업담당자뿐만 아니라 개발자까지 만나 궁금증을 풀 정도로 시장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꿈은 사양길을 걷고 있는 섬유 업계가 함께 사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 길의 안내자가 되겠다고 한다.약력: 1957년생. 79년 서울대 섬유공학과 졸업. 83년 서울대 공과대학원 석사. 83년 일신방직 입사. 91년 펜실베이니아주립대 MBA. 97년 우림방적엔지니어링 대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