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추락… 날개 언제 다시 펼까
‘꿈의 항공기’ 또는 ‘하늘을 나는 호텔’이라는 표현으로 칭송하는 비행기가 있다.다름 아닌 에어버스 A380을 말한다. 이 비행기가 에어버스가 경쟁사인 미국의 보잉을 겨냥해서 만든 비행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당 가격만 2억7,000만달러에 10년간 6,000여명의 기술자가 동원돼 140조원을 쏟아부어 개발한 비행기다. 지난 9월 시범운항을 시작한 이 비행기는 최근 한국도 방문, 본격 취항을 앞두고 세계 각국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길이 73m, 날개폭 79.8m, 높이 24.1m로 555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는 이 비행기는 제원에서 경쟁기종인 보잉의 747-400기종보다 모두 크며 현재 제작된 초대형 여객기다. 누구라도 한 번쯤 타고 싶어 하는 꿈의 비행기인 것이 사실이다.그런데 이 꿈의 비행기가 제대로 이륙할 수 있을지 의문시하는 시선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인도 시점이 계속 늦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행기의 인도는 지난해 6월 이후 벌써 세 번이나 연기됐다. 에어버스측은 최근 “기술적인 이유로 인해 납기 시점을 예정보다 최소 2년 늦출 계획”이라고 밝혔다.이미 수차례 인도 지연으로 주가가 급락하고 이로 인해 최고경영층도 여러 번 물갈이됐지만 사태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올 들어 단행된 에어버스와 이 회사의 모기업인 EADS의 최고경영층 교체 건수만 해도 다 세려면 숨이 찰 지경이다.지난 7월 초 에어버스는 A380항공기 인도 지연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시 최고경영자인 구스타프 훔베르트를 전격 교체했다. 후임에는 크리스티앙 스트레프가 임명됐으나 그 역시 취임한 지 불과 99일 만인 지난 10월9일 또다시 물러났다. 나름대로 구조조정 계획을 세워 밀어붙이던 그는 내부 반발에 못 이겨 결국 회사를 떠났다.모기업인 EADS도 마찬가지다. 7월 초 에어버스 최고경영자가 물러날 당시 EADS의 최고경영자인 노엘 포르지르 공동 CEO도 함께 자리에서 떠났다. 역시 항공기 인도 지연에 대한 책임이었다.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루이 갈루아는 결국 현재 크리스티앙 스트레프의 뒤를 이어 에어버스 최고경영자까지 겸하고 있다.이뿐만 아니다. 회사가 이렇고 납기가 늦어지자 페덱스는 최근 주문을 취소하고 에어버스 경쟁사인 보잉에 주문을 했다.이 같은 영향을 받아 지난 11월 중순 에어버스의 모회사인 EADS는 2억유로에 가까운 분기손실을 입었다고 발표했다.수주실적에서도 보잉을 제쳤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턱없이 보잉에 밀리고 있다.도대체 에어버스 내부에 어떤 일이 있기에 회사 꼴이 이럴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에어버스의 혼동 뒤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자리잡고 있다. 프랑스 알자스지방의 스트라스부르는 에어버스의 모회사 EADS가 탄생한 곳이다.자동차로 유명한 독일 다임러크라이슬러그룹과 프랑스 에어로스파시알-마트라그룹 경영진은 지난 99년 10월14일 만나 EADS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EADS는 그후 유럽 최대 여객기 제조업체인 에어버스 지분 80%를 인수해 최대주주가 됐다. 에어버스 역시 영국 BAE시스템스와 스페인 카자그룹의 합작기업이다. 이렇게 해서 유럽을 대표하는 항공사 에어버스는 독일과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 4개국 국적을 가진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이 같은 태생적 한계로 에어버스는 시작부터 갈등의 소지를 안고 태어났다.사분오열된 회사는 ‘콩가루집안’회사합병 초기부터 각국 출신 경영진 간에 회사 경영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각종 갈등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다임러크라이슬러그룹의 항공 분야 자회사인 다사의 최고경영자였던 맨프레드 비쇼프는 프랑스 정부가 가지고 있는 에어버스 지분 15%는 곧 독일이 집어삼켜야 할 대상 정도로만 생각했고 이 같은 생각이 프랑스 관계자들을 공분하게 만들었다. 이뿐만 아니다. 프랑스 경영자들은 EADS는 물론 에어버스 내에서도 자기들끼리 자리와 권력을 위한 싸움질을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4개국 출신 임원들은 회사의 이익보다 모국과 모국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식이었다.이렇게 사분오열된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기는 처음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정도였다.실제 ‘슈퍼 점보기’인 A380 납기 지연은 에어버스의 태생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대목이다. 에어버스 생산기지는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영국 4개국에 걸쳐 있다. 조종석과 비행기 중앙, 그리고 4개의 엔진은 프랑스가, 동체의 앞부분과 후방부, 수직 꼬리날개는 독일이 만든다. 꼬리 중에서도 수평 꼬리날개는 스페인이 만들며, 양쪽의 커다란 날개는 영국이 제작하는 방식이다. 비행기 제작상 효율 면은 거의 고려되지 않고 일자리창출이라는 각국 정치적 이익에 따른 사실상의 나눠먹기식 배분인 셈이다.<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에어버스와 모기업 EADS는 처음부터 잘못된 구조에 지붕을 실은 꼴”이라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집이 결국 구성원 간의 권력 암투로 추락하고 있다”고 보도했다.에어버스는 한동안 회사 내 각 세력이 경쟁적으로 수주에 나선 덕에 보잉사를 제치기도 했지만 납기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무책임한 수주전이었다는 것이 몇 년 후 모두 드러났다. 에어버스의 프랑스와 독일 인사들은 서로 성과 올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제품 준비기간이 촉박함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수주를 받기에 급급했다.특히 무리한 일정 속에 A380 개발을 강행하는 동안 적지 않은 문제가 속출했다.통상 비행기가 처음 런칭되고 나서 2~3년 후에나 수주물량에 대한 최종 인도가 이뤄진다. 그러나 A380의 경우 이 기간이 불과 1년에 불과했다. 특히 독일측에서는 빠듯한 일정에 맞추다 보니 필요한 엔지니어 수도 모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99년 처음으로 에어버스는 수주 면에서 보잉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촉박한 납기일로 그만큼 회사 내 압박은 높아졌고 독일과 프랑스로 나눠진 공장에서는 제대로 손발이 안 맞아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계속되는 A380기의 인도 시점 연기는 바로 독일과 프랑스 공장 간에 협조가 잘되지 않기 때문이다.독일과 프랑스 공장 간 제작일정이 맞지 않았고 더욱이 양국 공장에서 쓰던 소프트웨어가 달라 마지막 조립과정에서 부품들이 서로 맞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측 공장에서는 비행기 제작과 관련된 도면 등을 확인하기 위한 소프트웨어로 2차원의 구닥다리를 썼던 반면, 프랑스측은 좀더 최신식인 3차원 방식을 사용, 양측에서 제작한 부품을 결합하다 보면 소위 ‘이빨이 맞지 않는 일’이 속출했다.이뿐만 아니다. 영국에서 제작한 동체 본날개는 무게가 당초 스펙에 맞지 않아 쓸 수가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에어버스의 한 직원은 “이미 2001년 말과 2002년에 A380에 대한 기술적 결함을 알고 있었지만 중간에 조종하는 사람이 없었다”며 “사내 경보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전문가들은 에어버스가 기업공개를 통해 경영 투명성을 제고하고 각국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감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또 저가 항공사 시대에 2층짜리 대형 모델을 개발한 것이 전략적 착오인 만큼 보잉의 신형 모델 747-8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소형 모델 여객기를 새로 개발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떨어진 신뢰와 구멍 난 재정으로 인해 신규 투자에 따른 자금조달이 여의지 않은 상태다.에어버스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취임 후 99일 만에 그만둔 크리스티앙 스트레프 전 사장은 이 회사의 회생방안을 찾으려 다각적인 시도를 했지만 3개국에 걸친 주주로부터 다양한 압력이 가해져 제대로 운신할 수 없었고 결국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CEO임에도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스트레프 전 사장은 특히 비효율을 개선하기 위해 독일에 있는 공장을 폐쇄하고 프랑스로 통합하려고 하는 합리화안을 꺼냈으나 독일측으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여러 국가와 주주 간 이해관계가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힌 에어버스가 ‘하늘을 나는 호텔’을 이륙시킬 수 있을지 세계인이 지켜보고 있다.©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