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번쩍’…뱀꼬리 된 조세개혁
“네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심히 미약하더라.”정부가 추진한 중장기 조세개혁이 딱 그렇게 될 모양이다.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9월13일 오후 기자간담회에서 “현재 검토 중인 중장기 조세개혁 방안에는 어떤 세금의 세율조정도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권부총리는 “중장기 조세개혁은 오는 2010년까지를 대상기간으로 정해 마련 중”이라며 “그때까지는 정부가 비전 2030 등에서 추가적인 증세를 하지 않기로 한 만큼 세율조정은 포함시키지 않을 계획”이라고 말했다.명색이 ‘조세개혁’인데 세율을 조정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뭘 개혁한다는 걸까. 권부총리는 “이번 개혁은 세원 투명성 제고와 납세자 친화적 제도개편 등을 중심으로 만들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올해 말까지 논의가 잘되면 내년 초쯤 발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세제의 핵심은 건드리지 않고 주변 제도만 손질하겠다는 얘기다.정부의 중장기 조세개혁 추진은 상당히 거창하게 시작됐다. 단초는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초 던진 ‘동반성장’이란 화두였다.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확대가 핵심인 ‘동반성장’을 위해선 막대한 돈(세금)이 필요하고, 그 돈을 조달하려면 세제개혁을 해야 한다는 게 출발점이었다. 이 때문에 중장기 조세개혁은 결국 증세 방안으로 받아 들여졌다. 과연 어느 계층을 대상으로 어떤 세금을 올릴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이었다.이 중장기 조세개혁을 위해 정부는 대통령 자문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안에 조세개혁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재경부에는 조세개혁실무기획단을 둬 실무를 챙기도록 했다. 초안 마련에는 조세연구원 연구위원과 대학교수 등 수십명의 세제전문가가 동원돼 1년 이상의 연구작업을 벌였다.그러던 중장기 조세개혁이 점차 꼬리를 내리기 시작한 건 올 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지난 2월 초 정부의 중장기 조세개혁 방안이 일부 언론에 흘러나가 공개되면서다. 당시 밝혀진 정부 방안에는 현재 세금이 매겨지지 않는 학원비나 아파트관리비 등에도 부가가치세를 부과하고, 각종 소득공제나 면세 대상을 대폭 줄이는 전형적인 증세 방안이 담겨 있었다.온 나라가 뒤집혔던 건 물론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금을 더 걷겠다는 데 좋아 할 사람은 없다. 특히 그동안 세금을 내지 않던 사람들로부터 저소득층 지원을 위해 세금을 걷겠다고 정부가 나서자 여론은 등을 돌렸다. 5월31일 지방선거를 앞둔 정부·여당으로선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중장기 조세개혁 방안 발표는 지방선거 뒤로 연기됐다. 그 과정에서 당시 곽태원 조세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서강대 교수)이 자진사퇴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물론 그렇다고 중장기 조세개혁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꼭 미래 복지재원용 증세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대내외 경제여건 변화를 감안해 우리나라 세제의 대대적인 수술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동안 정치적 목적으로 남발돼 온 각종 비과세, 감면을 대폭 축소하고 부가가치세 등 간접세를 올리는 대신 소득세, 법인세 등 직접세를 낮추는 국제적 추세에 따라 국내 세제도 개편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때문에 정부가 일단 칼을 뽑은 이상 어떤 식으로든 중장기 시각에서 세제개혁이 이뤄질 것이란 기대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정부는 뽑은 칼로 무도 자르지 않고 칼집에 다시 넣을 태세다. 자칫 중장기 조세개혁이 또다시 증세 논란으로 번질 경우 내년 대선에 치명적이란 계산을 한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세계 어느 나라 정부도 세금을 올려놓고 선거에서 이긴 적이 없다”며 “그것을 잘 아는 대통령과 여당이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 세금부담을 늘리는 조세개혁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이에 대해 세제전문가들은 노무현 정부의 미숙한 세제개혁 추진을 탓한다. “세제개혁은 대선공약 등으로 내걸어 국민의 동의를 얻은 뒤 집권 초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추진하는 게 정석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집권 후반기 힘이 빠질 때 조세개혁을 추진하는 실수를 했다. 더구나 대통령의 지지도가 역대 최악일 때 조세개혁을 추진하는 것을 보면 조세개혁에 대해 정말로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익명을 요구한 대학교수)©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