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제본공장에서 고무골무를 끼고 인쇄물을 접었다. 나는 인쇄소 공무부 조역으로 출발했다….’강제철거 위기에 처한 허름한 집에 살며 공단에서 일하는 일가족 이야기를 그린 70년대 말의 베스트셀러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대목이다. 이 소설의 무대가 바로 구로공단이다. 이곳은 수많은 여성근로자들이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밤늦도록 일한 곳이다.단층건물에서 주로 섬유제품을 생산하며 수출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던 구로공단이 바뀌고 있다. 굴뚝은 사라지고 20층 안팎의 첨단빌딩이 숲을 이루고 있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석ㆍ박사급 엘리트 연구원들이 출퇴근길을 가득 메운다. 이름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었다. 반월, 시화, 광주, 구미공단, 창원 등 전국의 주요 산업단지 역시 변화를 겪고 있다.산업단지의 변신은 몇가지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아파트형 공장이 속속 들어서면서 스카이라인이 변하고 입주기업도 부쩍 늘고 있다. 최근 5년새 입주기업 변화를 보면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경우 712개사에서 4,648개사로, 반월은 1,561개사에서 2,698개사로 늘었다. 이런 현상은 여타 지역도 비슷하다. 단지별 면적은 크게 늘어난 게 없는데 단층짜리 공장이 아파트형 공장으로 바뀌면서 외지의 기업들이 봇물처럼 밀려들어오기 때문이다. 산업단지의 경우 분양가나 임차료가 저렴하고 경영 관련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이런 현상이 가속되고 있다.두 번째 변화는 클러스터(Clusterㆍ덩어리)화이다. 혼자 힘으로 경쟁력을 갖추는 데 어려움을 겪는 중견 중소기업들이 대학교수, 연구원, 벤처캐피털리스트, 컨설팅전문가, 법률전문가 등과 네트워크를 결성해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고 도움을 얻는 활동을 말한다. 아파트형 공장이 외형적인 변화라면 클러스터화는 질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산업단지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 중 하나로 혁신클러스터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를 촉진시키기 위해 반월(시화 포함), 군산, 광주, 구미, 울산, 창원, 원주 등 7개 지역을 혁신클러스터 시범단지로 지정해 올해 총 300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또 내년부터 혁신클러스터 지정을 확대할 예정이다. 클러스터는 미국의 실리콘밸리나 일본의 도요타자동차클러스터, 스웨덴의 시스타사이언스파크, 핀란드의 울루, 영국의 남동잉글랜드클러스터 등을 모델로 삼고 있다.실리콘밸리는 스탠퍼드대학과 벤처기업, 벤처캐피털들이 모인 대표적인 클러스터다. 도요타자동차클러스터는 도요타를 중심으로 부품업체 500여개사와 도요타공대, 도요타중앙연구소 등이 밀집돼 자동차 분야에서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다. 스웨덴의 시스타사이언스파크는 에릭슨이 입주하면서 클러스터를 형성하기 시작해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 IBM, 애플, HP 등의 연구센터나 현지법인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밖에 영국의 남동잉글랜드클러스터는 산업밀집지역. 이곳에 남동잉글랜드개발청(SEED)이 8개의 대형클러스터를 발족시키면서 5만여개 기업과 옥스퍼드 등 20여개 대학, 그리고 연구소간의 네트워킹을 돕고 있다.국내의 시범클러스터들은 이 같은 외국의 사례를 참조하면서 단지별로 특성이 있는 클러스터를 만들어가고 있다. 창원의 경우 효율적인 클러스터 활동을 위해 공작기계, 금형 등 5개 미니클러스터가 발족됐고 구미에선 디스플레이, 홈네트워크 등의 10개 미니클러스터가 활동을 시작했다. 울산에선 자동차부품 분야의 4개, 반월 시화에선 부품소재 분야의 7개 미니클러스터가 움직이며 재도약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