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립식펀드의 ‘힘’이 놀랍다. 전인미답의 지수 1200대를 단번에 뚫더니 ‘대세상승’이란 타이틀까지 만들어냈다. 웬만한 유혹에는 꿈쩍도 하지 않던 시중 부동자금마저 적립식펀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토지신화로 다져진 부동산 ‘불패론’마저 기가 꺾이기 시작했다. 증권가에선 이를 ‘혁명’으로 받아들인다. 바야흐로 적립식펀드가 ‘온 국민의 재테크’로 떠오른 셈. 이대로라면 자산시장의 완전정복도 멀지 않았다. 홍성국 대우증권 투자분석부장은 “적립식펀드의 붐업을 계기로 재테크 패러다임이 저축에서 투자로 옮아가고 있다”며 “이 추세는 향후 더 뚜렷해질 것”이라고 전했다.적립식펀드는 ‘블랙홀’로 비유된다. 엄청난 식성으로 유동자금을 끌어당기고 있어서다. 차일피일 눈치작전만 펼치던 보수성향의 자금마저 가입 열풍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PB전문가들에 따르면 최근 거액자산가의 가입문의가 눈에 띄게 급증했다. 관심은 곧 투자로 이어진다. 월 500만~1,000만원씩 넣는 큰손 고객이 적잖게 늘었다. 10억~20억원의 뭉칫돈을 한 번에 넣겠다(거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김휘곤 한국펀드평가 팀장은 “유학 후 최근 귀국한 후배가 첫 월급부터 적립식펀드에 들겠다고 조언을 구했다”며 “일각에서 과열을 염려할 만큼 엄청난 히트상품으로 떴다”고 말했다.따져보면 적립식펀드는 새로운 게 아니다. 한꺼번에 투자(거치)하느냐, 나눠 넣느냐(적립)의 차이로 그간 거치식이 더 각광을 받았을 뿐이다. 적립식이 호평을 받는 데는 그 특장점이 최근의 자산시장 상황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적립식 투자 효과가 시너지를 낼 만큼 제반 환경이 우호적이었다는 얘기다. 저금리ㆍ저성장 결과 노후대비에 대한 위기감이 적립식의 특장점인 장기ㆍ분산투자의 필요성을 낳았다는 논리가 대표적이다. 부동산 투자심리를 꽁꽁 묶은 고강도 투기억제책(8ㆍ31대책 등)도 분위기 조성에 한몫 했다. 붐업은 지난해 10월부터 본격화됐다.전성시대에 돌입한 적립식펀드의 규모를 살펴보자. 자산운용협회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현재 펀드계좌수는 모두 731만좌이다. 지난해 8월(390만좌)보다 2배 정도 늘었다. 이중 적립식펀드는 350만1,682좌에 달한다. 펀드상품의 47.92%가 적립식인 셈이다. 증가속도도 빠르다. 6월(307만좌), 7월(321만좌), 8월(350만좌) 등 매월 20만~30만좌씩 늘고 있다. 수탁고도 9조2,415억원(8월 말)에 이른다. 3월(6조5,520억원)에 비해 3조원 가까이 증가했다. 8월에만 무려 7,561억원이 증가했다. 아직 통계가 집계되지 않았지만 유입 속도를 감안하면 현재(10월 중순) 수탁고 10조원은 무난히 돌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적립식 파워에 힘입어 주식형펀드의 수탁고도 탄탄해졌다. 하루 평균 2,000억원 가량 늘더니 지금은 17조원대에 안착했다. 16조원을 뚫은 지 5거래일(일주일) 만의 성과다. ‘13조원 → 14조원’이 되는 데 한달이 걸렸던 것에 비하면 눈부신 증가속도다.적립식펀드가 뜬 데는 여러 이유가 섞여 있다. 우선 재테크 환경이 변했다. 현재 한국경제는 저성장ㆍ저금리의 딜레마에 직면했다. ‘사오정ㆍ삼팔선’이란 유행어처럼 당장 노동시간이 짧아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령화사회는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한국사회를 압박 중이다. 먹고살 시간은 길어졌는데, 마땅히 돈 벌 거리는 줄어든 구조다. 연금 등 노후 대비 시스템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위기감의 본질은 경제적 정년으로 꼽히는 50세 이후 펼쳐질 ‘지출 > 수익’ 곡선의 탈피에 있다. 결국 ‘저축 → 투자’로의 인식전환이 불가피해졌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란 점에서 예ㆍ적금이나 채권 등 안전자산에 대한 메리트도 떨어졌다.적립식펀드 자체 내공도 상당하다. 적립식펀드는 간접상품이다. 거액의 공동투자인 덕에 거래비용이 저렴하다. 게다가 투자정보ㆍ노하우를 갖춘 전문가가 운용한다. 운용사 고유재산과 분리ㆍ운용돼 안정성도 높다. 장기ㆍ분산효과로 위험관리와 함께 투자 목적에 어울리는 맞춤투자도 가능하다. 아직은 초기지만 안정성도 일부 검증됐다. 94년 개인연금상품(기업연금 형태)에 들었다면 수익률(주식형 적립펀드)은 연평균 10%에 달한다. 무엇보다 증시활황이 큰 힘이 됐다. 그간의 구조조정ㆍ실적개선 결과 한국기업의 경쟁력은 굉장히 좋아졌다. 고객 입장에선 투자자산(기업)이 한층 건실해진 셈이다. 3년 이상의 장기상품인 까닭에 가치투자가 가능한 점도 고무적이다. 판매사가 중심이 된 마케팅 강화도 붐을 확대시킨 배경이다.다만 적립식펀드에는 조심할 게 적잖다. ‘묻지 마’ 가입자라면 뒤통수를 맞을 함정도 많다. 매력적인 만큼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적잖아서다. 대표적인 게 원금보장의 환상이다. 적립식펀드는 안정적이긴 해도 손실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다. 실적연동형 배당상품으로 원금손실이 늘 가능하다. 은행 창구에서 가입한다고 원리금이 보장되는 저축상품은 아니다. 결국 금융감독원은 수익률 과대 포장과 손실ㆍ위험 불성실고지 여부에 대한 실태점검에 들어갈 예정이다. 또 금리상승ㆍ주가하락 때는 확정금리상품이 적립식펀드보다 더 유리할 수 있다. 최근 장세라면 채권형 가입자도 득본 게 별로 없다. 더 결정적인 위험은 과도한 적립식 투자자금이 버블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불어난 이체자금이 향후 주식수요를 더 늘려 기업가치 이상의 주가 거품을 야기하기 때문이다.실제로 비슷한 불만이 최근 쏟아졌다. 적립식펀드 성과가 생각보다 낮다는 문제제기다. 실제로 최근 1년만 놓고 보면 적립식 성과는 생각보다 별로다. 제로인 조사결과를 보면 적금 붓듯 조금씩 투자하는 것보다 한꺼번에 목돈을 투자한 펀드의 수익률이 월등히 앞섰다. ‘적립식 < 거치식’인 셈이다. 이는 지수가 거침없이 ‘우상향(↗)’한 결과다. 적립식펀드의 최대무기로 일컬어지는 ‘매입단가 하락효과’가 발휘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2004년 8월~2005년 9월 기간수익률 1위를 기록한 ‘H펀드’를 보자. 적립식 수익률(34%)이 거치식(111%)은커녕 시장평균(71%)보다 낮게 나왔다. 적립식펀드 수익률은 주가지수가 V자를 띨 때 가장 효과적이다. 반대로 역V자 때는 최악이다. 이재순 제로인 팀장은 “적립식은 장기투자 때 효과가 크다”며 “제대로 알고 가입해야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