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전시장이 한ㆍ중ㆍ일 삼국의 격전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중국의 약진과 일본의 반격으로 세계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킨 한국과의 격렬한 충돌이 불가피해진 것. 한ㆍ중ㆍ일 삼국 가전업체들의 전체 매출 가운데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70%가 넘는다.더군다나 ‘한ㆍ중ㆍ일 수출상품 중복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무역협회 자료는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 100대 수출품목 중 일본과 53%, 중국과 41%가 겹친다.이미 세계 가전시장에서 한ㆍ중ㆍ일 삼국은 한 치의 양보 없는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 TV시장판도가 삼국의 경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반TV 판매량의 세계 시장점유율을 보면 LG와 삼성이 1ㆍ2위를, 소니가 5위를 차지하고 있다. 3위 TTE가 중국 TCL과 프랑스 톰슨의 TV 합작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ㆍ중ㆍ일 삼국 기업들이 5위권에 4개사나 진입한 것.PDP, LCD-TV는 한ㆍ일간 1ㆍ2위 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중국기업들이 5위권 밖으로 밀려나긴 했지만 언제 추격당할지 모를 일이다. PC는 올 2분기 세계 PC시장 출하량을 보면 중국 레노버가 3위, 후지쯔가 5위권에 들었다. 이밖에 에어컨을 비롯해 전자레인지, 청소기, 소형 냉장고 등에서는 중국이 우위를 다지고 있다.중국 ‘가격으로 밀어붙여’중국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중국은 앞으로 3~5년 내 세계 정보가전 시장의 패주가 될 것입니다.’최근 중국 칭다오에서 열린 제4회 국제가전박람회에서 루즈청 칭화둥팡 총재는 한국기자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루즈청 총재가 이처럼 자신만만해 하는 것은 중국이 세계 전자제품의 최대 제조기지이기 때문에 낮은 비용으로 양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데다 유행을 받아들이는 소비인구도 세계에서 가장 많다는 것.무엇보다 중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저가공세로 한국업체들이 닦아놓은 시장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지난 6월 일본전기공업협회가 전자레인지, 청소기, 세탁기, 냉장고, 전기면도기, 전기밥솥, 에어컨 등 7개 백색가전에 대해 주요 국가별 2003년 수출규모를 분석한 결과 중국산이 세탁기를 제외한 6개 품목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특히 전자레인지는 세계 62개국 수요량 4,615만대 중 79.3%에 해당하는 3,660만대가 중국산(Made in China)인 것으로 조사됐다.여기에는 한국, 일본기업들의 중국 내 현지생산량이 포함된 것이기는 하나 중국의 파워를 짐작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실제 중국 로컬업체들의 백색가전 기술은 이미 한국업체 수준에 근접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특히 중국 칭따오에 본사를 둔 하이얼은 태풍의 눈이다. 하이얼은 중국 가전시장의 21%, 백색가전 시장의 30%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중국을 대표하는 가전기업이다. 전세계 가전시장에서 가격파괴 바람을 일으키며 160개국에 가전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하이얼은 지난해 1,000억위안(약 15조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세계 4위 백색가전업체로 올라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물론 LCD와 PDP-TV 등 프리미엄급 시장에서는 5위권 밖에 밀려나 있지만 마치 블랙홀처럼 선진기술을 흡수하는 데 혈안이 돼 있는 중국기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TCL은 동남아시아와 인도에서 현지생산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TCL이 위안화 절상에 대비하고 한국, 일본 가전업체들과 경쟁하기 위해 현지생산을 강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TCL은 또 에어컨, 세탁기 등 백색가전의 현지생산도 추진해 한국, 일본업체를 추격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생산거점인 베트남에서 현재 60만대를 생산하는데 이를 2년 내 100만대로 끌어올리고 태국, 말레이시아 등에 공급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창홍, 커롱, 메이더 등이 전세계에 걸쳐 판매망을 구축하고 있다.일본 ‘명가 부활 노려’일본도 자존심 회복에 본격 나섰다. 왕년의 ‘TV 황제’ 소니가 공식적으로 가전명가 부활을 선언했다. LCD-TV 브랜드를 ‘브레이비아’(Bravia)로 바꾸고 공격적 마케팅에 나섰다.‘파나소닉’ 브랜드로 유명한 마쓰시타, LCD-TV 최강자 샤프, 전통의 히타치 등도 지난 10년의 설움을 훌훌 털고 명성 찾기에 올인했다. 미쓰비시, 샤프, 히타치 등 일본의 평판TV 메이커들도 북미, 중국 등 해외시장 진출에 적극적이다.지난 7월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전자정보기술산업협회(JEITA)의 발표를 인용, 일본시장에서의 경쟁심화가 가격하락을 불러오면서 기업들이 점차 해외시장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고 보도했다.특히 세계 최대 TV 수요시장인 미국에서 고소득자들에게 고급 평판TV를 팔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북미시장에서 PDP-TV 시장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마쓰시타는 ‘비에라’(VIERA)라는 브랜드로 해외영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LCD-TV의 강자인 샤프도 북미공략에 사활을 걸고 있다.히타치는 중국시장 공략에 바짝 고삐를 당기고 있다. 히타치는 최근 중국 내 마케팅사업소를 4배로 늘리며 평판TV로 옛 명성을 찾고자 한다.일본 가전업체들은 TV에 이어 세계 최대 에어컨 시장인 유럽을 공략하기 위해 생산설비 증설에 나서고 있다.<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산요전기, 히타치제작소, 다이킨공업 등 일본 가전업체들이 저소비전력 신제품을 개발하는 한편 중국, 말레이시아 등 현지공장의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있다는 것이다.산요전기는 중국 광둥성 자회사인 광둥산요공조기에 약 100억원을 투입해 가정용 에어컨 생산공장을 건설 중이다. 이탈리아 현지 생산공장에 이어 중국을 유럽 공략의 제2거점으로 육성할 방침이다. 다이킨공업은 지난해 체코 필센시에 소형 가정용 에어컨 조립공장을 지었다. 이밖에 히타치, 마쓰시타 등도 고삐를 바짝 당기고 있다.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일본 전자업체들의 해외법인수는 총 2,240개다. 마쓰시타(214개), 소니(106개), 도시바(93개), 미쓰비시전기(93개), 산요전기(87개), 히타치제작소(81개) 등이 10년 불황에서 벗어난 기세를 몰아 세계시장 공략에 적극 나선다면 한국기업들로서는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참고로 삼성전자의 해외법인수는 64개다.LG와 삼성 등 한국 가전업체들은 일단 중국의 공세는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있다.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고객과 시장이 다르다는 것이다.“한국기업들은 프리미엄급 제품 시장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고품격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쌓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시장확대를 하는 업체가 단기간에 쌓아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LG 관계자)중국업체와 직접 경쟁하는 시장은 중국 내수 및 염가형 제품에 머물려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미에서 하이얼이 소형 냉장고 중심으로 시장을 공략하고 있을 때 LG는 대용량 드럼세탁기 트롬과 양문형 냉장고를 최고급 브랜드로 구축했다는 것. 삼성도 마찬가지다. 저가형 제품 퇴출을 통해 한계사업을 정리하고 프리미엄 가전분야에 집중해 수익성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일본의 반격에 대해서는 다소 긴장하는 눈치지만 유럽이나 북미시장에서 몇몇 품목은 일본보다 가격을 높게 받을 정도로 입지를 굳혔기에 한번 해볼 만하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한국 가전업체들이 고품격을 지향하며 ‘브랜드 경영’에 적극 나서는 것도 중국의 저가공세를 이겨내고 야구로 치면 메이저리그나 다름없는 유럽과 북미시장에서 확실한 입지를 다지겠다는 전략이다.분명한 것은 북미, 유럽을 포함해 인도, 브라질 등 신흥시장에 이르기까지 한ㆍ중ㆍ일 삼국의 전면전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품질의 일본과 가격의 중국 사이에서 독자영역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업체의 살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