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처럼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높고 자립도 낮은 나라가 없다. 여기에 위기 불감증마저 심각한 수준이니 보통 큰일이 아니다.”지난 9월27일부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05 에너지전시회’에서는 연일 관련업계의 세미나가 이어졌다. 주제는 각기 달랐지만 한국의 에너지 위기와 사회 인식부족 문제는 수없이 제기됐다. 초고유가가 지속되는 숨가쁜 상황에도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형국이라는 게 전시회 참가 전문가들의 공통된 한탄이었다. 한 참석자는 “지금은 온 국민이 에너지 문제를 외면하지만 향후 10년 이내에 대혼란이 와 피부로 알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에너지시민연대 한 관계자는 “일전에 열린 세미나에선 에너지 및 기후협약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이가 산업자원부 공무원과 NGO 관계자 등 많아야 200명 정도라는 질타가 터져나왔다”고 전했다.실제로 각종 지표는 한국의 에너지 위기를 잘 나타내준다. 우선 경제규모에 비해 에너지 소비량이 너무 많다. 경제규모 세계 11위, 인구 25위인 한국의 에너지 소비는 세계 10위, 특히 석유소비는 세계 7위에 랭크돼 있다. 이는 캐나다, 프랑스, 이탈리아에 비해서도 높은 수준이다.게다가 총에너지의 97%를 해외에 의존하면서도 에너지 소비효율성은 일본의 3분의 1 수준이다. 2004년 에너지 총수입액은 496억달러로 전체 수입액 2,245억달러의 22.1%를 차지했다. 반도체 수출액 265억달러, 자동차 수출액 266억달러를 합한 금액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이에 비해 에너지 효율성은 바닥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에너지 소비효율성을 나타내는 TOE는 일본이 평균 0.11, 대만 0.28, 미국이 0.22인 데 반해 한국은 무려 0.36에 달한다. 더욱이 이 수치는 다른 나라들이 효율성을 높일 때 오히려 나빠진 것이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너지 효율성까지 나빠지고 있으니 이 자체만으로도 위기라는 것이다.또 1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이미 일본,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을 추월한 상태다. 평균 4.27TOE로 24위에 랭크돼 있지만 세계 평균 1.68과 비교하면 크게 높은 수준이다.에너지 소비가 많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산업구조 측면에서 전체 산업 중 에너지 사용량이 많은 화학, 1차 금속, 석유제품, 전력, 가스 등 8개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5.9%에 달한다. 일본의 20.4%를 웃도는 전형적인 에너지 다소비형 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에너지 절약이 어려운 납사, 코크스용 유연탄 등 원료용 비중이 크다는 점이다. 또 자동차 및 가전기기 보급이 증가하고 대형화하면서 민간에서의 에너지 사용량이 급증한 것도 큰 요인으로 꼽힌다.실제로 민간에서 지출하는 에너지 비용은 가계지출에서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04년 도시가구당 월평균 에너지비용은 82만5,000원으로 가계지출 2,360만4,000원의 3.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압도적인 중동 의존도도 문제로 지적된다. 원유산지는 중동, 동남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미주 등으로 다양하지만 유독 중동에만 78.1%의 수입선이 몰려 있는 현실이다. 산자부 통계에 따르면 원유수입의 중동 의존도는 80년 98.8%에서 85년 57%선으로 낮아졌다가 89년 이후 다시 70%대 수준으로 상승했다. 최근 중동지역의 불안, 원유시장에의 투기자금 유입 등의 위협요인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셈이다.일각에서는 80년대 중반 유가가 급속 하락한 이후 2003년까지 약 18년 동안 78년 가격(실질가격)을 하회하는 저유가 단계에 머무르는 동안 ‘대책 없이 저유가를 향유했다’는 질책이 나오고 있다. 에너지 위기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다 초고유가가 지속되는 지금에야 움직이는 것은 이미 한발 늦었다는 것이다.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국내 생산 에너지가 점차 증가하면서 에너지 자립도도 미약하나마 증가세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수입에너지는 2억2,611만TOE, 국내 생산 에너지는 5,290만TOE로 에너지 자립도가 22.65%까지 올라갔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8% 정도 증가한 수치다. 또 석유소비가 2002년 이후 50% 이하로 떨어졌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지난해 기준 1차 에너지 소비에서 석유는 45.6%, LNG는 12.9%를 차지했다.여기에 신ㆍ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점도 바람직한 현상으로 꼽힌다. 산자부 관계자는 “에너지절약전문기업(ESCO) 지원제도 운영, 산업부문과의 에너지절약 자발적 협약 등을 통해 에너지 이용 효율화 3개년 계획을 올해부터 추진하고 있다”면서 “태양광, 풍력, 수력 등 신ㆍ재생에너지의 공급도 늘고 있어 그리 비관적인 상황만은 아니다”고 말했다.실제로 정부는 신ㆍ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를 위해 지난 7월 ‘신에너지 및 재생에너지 개발ㆍ이용ㆍ보급촉진법’을 개정, 각종 지원제도를 운영 중이다. 2011년까지 1차 에너지 사용량 기준 5% 보급이 목표다. 또 외교를 통해 원활한 자원확보를 꾀하는 자원외교를 강화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카자흐스탄, 러시아, 남미 등지에서 적극적인 자원외교를 펴면서 긍정적인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최근에는 러시아, 중국 등 동북아시아 6개국이 참여하는 ‘동북아 에너지협의체’ 구성을 제안하기로 하는 등 발빠른 움직임에 나섰다.그러나 에너지 관리의 기본이 될 에너지기본법 제정이 이해관계에 얽혀 장기 표류하고 있는 등 정부의 기본자세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많다. 지난 2003년 에너지시민연대가 의원발의를 통해 법안을 상정하면서 시작된 에너지기본법 제정 움직임은 산자부, 민주노동당이 각기 법안을 제출하면서 혼돈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에너지기본법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3개의 법안이 상정되는 해프닝이 일어난 배경은 결국 ‘밥그릇 싸움’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국가에너지위원회 설치라는 사안을 둘러싸고 시민단체와 정부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성문 에너지시민연대 정책부장은 “에너지 관련 법제는 무원칙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형태로 규율되고 있다”면서 “에너지 위기의 심각성을 감안, 신속하게 기본법을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