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투자위축 따라 침체 불가피 … 정부의 고강도 특단대책 필요

‘고유가 파도를 넘어서라.’고유가 악령에 글로벌 경제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후폭풍은 거세다. 탄력 좋던 글로벌 경제의 회복세는 고유가 걸림돌에 당장 멈춰섰다. 경제지표도 순식간에 꺾였다. 천정부지의 유가흐름과 정반대 모양새다. ‘설마’했던 배럴당 100달러 돌파도 눈앞의 걱정거리로 다가왔다. 전문가들의 경고발언 수위도 한층 높아졌다. 당초 “생각보다 큰 충격은 없을 것”이란 전망이 몇 달 새 “이대로라면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란 말로 대체됐다.실제로 고유가 부메랑의 파워는 충격적이다. 시간이 갈수록 여파ㆍ피로가 누적되는 양상이다. 처음에는 버텼다 해도 높아지는 신음소리까지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향후 원유의 초과 수요가 대세인 탓에 위기감도 전에 없이 높다. 승승장구하던 미국 소비자신뢰지수는 2년 만에 최저치로 급락했다. 86.6을 기록한 9월 소비자신뢰지수는 전월(8월 105.5)보다 18.9포인트나 추락했다. 경제주체들이 총동원령하에 장기대책 마련에 나선 배경이다. 한국경제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경제를 둘러싼 가계ㆍ기업ㆍ정부ㆍ해외 등 경제 4주체의 소비ㆍ투자심리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렇잖아도 갈 길 바쁜 한국경제로서는 고유가 짐이 한층 부담스럽다.고유가 영향은 ‘전방위’적이다. 실물ㆍ금융시장 모두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물가는 뛰고 수출은 감소한다. 소비ㆍ투자위축에 따라 경기침체가 불가피하다. 당장은 아니지만 주식ㆍ부동산 등 자산시장에도 악재로 작용한다. 산업 전체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일부 수혜업종(석유화학ㆍ정유주 등)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채산성이 극도로 악화된다.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모델인 까닭에 석유의존도가 높아서다. 특히 중소기업일수록 타격이 크다. 상당수 기업에 고유가 대응전략이 없다는 점도 위험을 높이는 요소다. 그나마 고무적인 건 에너지 효율이 높아졌고 석유의존도가 과거에 비해 낮아졌다는 점이다.유가상승의 거시경제 효과를 살펴보자. 국제원자력기구에 따르면 유가가 10달러(배럴당) 오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GDP는 0.4%포인트 떨어진다(미국 0.25%ㆍ일본 0.4%ㆍEU 0.5% 등). 소비자물가는 0.5%포인트 오르는 반면, 경상수지는 320억달러 적자를 낼 것으로 전망됐다. 고유가는 한국경제에 더 충격적이다. 유가 10달러(배럴당) 상승 때 삼성경제연구소ㆍ현대경제연구원은 한국의 GDP가 각각 1.34%ㆍ1.5% 감소할 것으로 분석했다. 또 삼성경제연구소는 소비자물가가 1.7% 오르고 약 80억달러의 무역적자를 낼 것으로 전망했다. 대한상의는 유가와 원자재를 함께 묶어 각각 10% 상승할 때 GDP는 0.5%, 무역수지는 25억달러 감소한다는 통계를 내놓았다.유가상승은 교역조건도 악화시킨다. 종착지는 무역흑자 축소다. 제조원가 인상으로 수출경쟁력이 악화되는데다 해외수요까지 위축돼 수출축소가 불가피하다. 반면 석유수입액이 늘면 수입증가 효과를 낳는다. 신승관 무역연구소 동향분석팀 연구위원은 “유가상승에 따른 생산비용 상승효과는 한국이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구조이기 때문”이라며 “똑같은 유가하락에도 불구, 가격경쟁력 악화 영향은 한국이 더 크게 받는다”고 말했다. 유가상승은 1차적으로 석유제품 가격을 올린다. 제조원가를 압박해 기업의 채산성을 악화시킨다.통계(중기협)를 보면 원유가격이 10% 오르면 제조원가는 0.43% 상승한다. 특히 제조업(0.7%)이 서비스업(0.19%)보다 비용상승 효과가 높다. 제조업 에너지원 중 절반 이상(52.9%ㆍ2001년)이 석유인 까닭에서다.기업부문이 느끼는 위기의식은 더 심각하다. 전경련 설문조사(7월 실시)에 따르면 올 하반기 유가가 배럴당 50달러대를 유지할 경우 60% 이상의 기업이 수익성 악화를 우려했다. 물류비를 비롯한 원가부담이 높아져서다. 응답자의 65.7%가 5~10% 가량의 원가부담을 걱정했다. 대한상의도 비슷한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섬유ㆍ전기전자ㆍ철강ㆍ조선 등의 업종은 이미 채산성 악화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바이유 기준으로 배럴당 40달러를 넘기면 기업운영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업종도 상당수에 달했다. 9월29일 현재 배럴당 56.21달러인 걸 감안하면 한계상황을 넘긴 지 오래다. 그렇다고 비용 인상분을 제품가격에 반영하기도 어렵다. 가뜩이나 침체된 국내 소비시장 때문이다.또 고유가는 물가인상의 주범이다. 실제로 최근 물가불안을 필두로 유가급등의 부작용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50달러를 넘는 고유가가 지속되면 물가상승 압력과 구매력 저하를 통한 내수경기 둔화는 기정사실이다. 올 1월 이후 3%대 초반에 안착한 소비자물가가 4분기 이후 4%대로 뛸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배럴당 유가가 10% 오를 때 적게는 0.1%(KDI)에서 많게는 0.56%(한국은행)까지 소비자물가가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생산자물가의 인상폭은 더 크다. 중기협 자료에 따르면 원유 수입단가가 10% 변동할 때 소비자ㆍ생산자물가는 각각 0.37%ㆍ0.61% 움직이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환율하락이 수입단가를 낮추는 건 다행이다.고유가는 금융시장에도 파장을 미친다. 지금은 ‘약달러’(원화강세) 시대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약달러를 내세워 내수회복에 성공했다. 달러는 흔히 원자재와 함께 국제자본의 주요 투자대상이다. 만약 달러를 보유한 국제투자가들이 달러 보유를 기피하는 대신 원유 등 원자재 수요를 더 늘리면 ‘원자재가격↑ㆍ달러가치↓’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한국기업으로선 ‘고유가ㆍ고원자재가’라는 이중고에 직면한다는 시나리오다. 손영기 대한상의 경제조사팀장은 “본격적인 내수회복이 이뤄지지 않은 한국경제가 이들 이중고에 휘둘리는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더불어 고유가는 인플레이션(금리인상)을 야기해 물가상승을 한층 가속화한다.그럼에도 불구, 금융시장 중 증시만은 고유가 후폭풍의 ‘예외지역’으로 거론된다. 고유가가 악재인 건 분명하지만 이를 상쇄하기에 충분한 대형호재가 버티고 있어서다. 1200선을 훌쩍 넘긴 사상 최고치 경신엔 여러 에너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기업실적 개선과 체질향상, 그간의 저평가에 따른 증시 재평가 움직임, 수급호조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로선 금리인상 움직임도 증시의 대세상승 추세를 꺾기는 역부족하다. 다만 일각에선 경기는 안 좋은데 주가만 오르는 현상을 우려하기도 한다. 이른바 증시와 실물경제간 괴리현상이다.고유가시대를 버텨내기 위한 개별기업의 대응책 마련은 적잖이 소극적이다. 전경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회원사 중 18%만이 대체에너지 투입 등 적극적 대응을 계획한다고 밝혔다. 나머지 업체는 비용절감 운동(43.1%), 제품가격 반영(16.5%), 무대책(6.0%) 등을 꼽았다. 16.4%는 고용ㆍ생산감축 및 한계사업 정리 같은 구조조정을 고유가 대응책으로 소개했다. 대한상의 분석은 더 절망적이다. 유가급등에 따른 비상계획을 수립한 기업은 21.3%에 불과하다. 그나마 내수기업(15.5%)보다 수출기업(36.8%)이, 중소기업(13.5%)보다 대기업(27.1%)이 더 적극적이다. 비상계획을 세운다한들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란 응답이 61.1%를 차지했다. 유가하락말고는 뚜렷한 방안이 없다는 응답도 32.4%로 집계됐다.정부 역할에 대한 주문도 잇따른다. 전무 대한상의 산업환경팀장은 “유가급등ㆍ내수침체로 많은 기업이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며 “경제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세제ㆍ시설투자 지원 확대, 에너지 절약에 대한 실질적 인센티브 제공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특히 시급한 과제로 원유수입 부과금과 할당 관세 추가 인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는 기업 채산성 확보 차원의 문제로 직결된다. 물가안정에 주력해 소비심리를 안정시키고, 비생산부문의 에너지 소비 억제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도 적잖다. 정부 비축유의 조기 방출도 일부 거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