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자율선택권 강화, 기존 퇴직금제도 병행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되면 우리나라의 연금제도는 완전한 틀을 갖추게 된다. 국가(국민연금), 개인(개인연금)에 이어 기업도 은퇴 후의 노후생활을 보장하게 된 것이다.퇴직연금은 국민연금과 개인연금의 틈을 상당부분 보완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민연금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연금 지급액이 넉넉지 않다. 반면 개인연금은 지급액은 풍족하지만 보험금 부담 탓에 가입자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퇴직연금은 대한민국 모든 근로자가 가입될 뿐만 아니라 보험료 수준도 현행 퇴직금 이상이어서 노후의 안정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보험료 부담은 연금 수혜자인 가입자가 아니라 사용자가 지는 구조다.퇴직연금제도는 일명 ‘기업연금제도’라고도 불린다. 기업이 근로자의 퇴직 후에 연금을 지급한다는 의미다. 사실 이전에도 기업이 근로자의 퇴직 후 생활을 보장하는 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근로기준법상의 ‘법정퇴직금제도’가 그것이다. 이 제도는 사용자는 사내(퇴직급여충당금의 형태) 또는 사외(퇴직보험 또는 퇴직신탁의 형태)에 돈을 적립, 퇴직하는 근로자에게 일정금액(근속연수×30일 이상의 평균임금)을 일시금으로 지급했다.퇴직금제도는 근로자들에게 목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를 줬지만 문제가 적잖았다. 우선 한 직장에서 장기근속하는 근로자가 감소하면서 퇴직금이 노후대책이 아니라 일시적인 생활자금으로 소진되는 사례가 빈번해졌다. 게다가 퇴직금제도는 근로자 5인 이상의 사업장에서만 의무화돼 있어 상당수의 근로자는 퇴직금제도의 혜택에서 제외됐다.이에 비해 퇴직연금은 종업원수에 상관없이 모든 사업장에 적용돼 수혜자가 크게 늘어난다. 55세 이상이 돼야 연금을 받을 수 있어 은퇴 이전의 생활자금으로 소진되는 일도 줄어든다.퇴직연금의 운영방식은 지난 1월27일 공포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이하 보장법)과 지난 8월9일 발표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시행령’(이하 시행령)에 잘 나타나 있다.우선 기존 퇴직금제도는 근로기준법에서 분리돼 퇴직연금과 함께 새로 시행되는 보장법에 포함, 운영된다. 현행 퇴직보험 또는 퇴직신탁제도는 폐지된다. 단 5년의 정리기간을 둬 점진적인 전환을 유도한다는 방침이다.퇴직보험이나 퇴직신탁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사업장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기존 퇴직보험 또는 퇴직신탁을 퇴직연금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또는 기존의 퇴직보험을 정리하고 퇴직연금제도를 새로 도입해야 한다. 이 경우 이미 적립된 퇴직보험금은 해당 가입자가 퇴직할 때 지급된다.이번에 도입되는 퇴직연금제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노사의 자율적 선택을 크게 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로자퇴직급여에 관한 큰 틀은 정부가 내놓았지만 이를 적용하는 시기와 방식 등은 각 사업장의 특성을 고려, 자율에 맡기는 측면이 적잖다.우선 퇴직금과 퇴직연금 가운데 어떤 제도를 선택할 것인지는 근로자대표의 동의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 선택된 제도의 내용을 변경하고자 할 때도 근로자대표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노사가 합의했다면 한 사업장에서 퇴직금이나 퇴직연금제도를 동시에 시행할 수도 있다. 특성이 다른 근로자집단별로 다른 형태의 퇴직급여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것이다.이번에 도입된 퇴직연금제도는 확정급여형퇴직연금제도(DB)와 확정기여형퇴직연금제도(DC) 등 2종류다. 두 제도의 기본적인 운영 프로세스는 동일하다. 먼저 사용자와 근로자는 협의를 통해 둘 중 하나의 제도를 선택한다. 이 규약에 따라 사용자는 보험사나 은행 등 자산관리기관에 보험료를 납입한다. 자산관리기관은 이 돈을 운용관리기관의 지시에 따라 운용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금이 근로자의 연금으로 지급되는 순서다. 운용방식은 근로자의 수급권을 보장하기 위해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필수적으로 포함해야 하고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는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할 수 있다.기본은 비슷하지만 세부과정에선 적잖은 차이가 있다. DB와 DC의 차이는 근로자가 받을 급여와 사용자가 부담할 보험료 가운데 무엇을 먼저 확정하느냐에 따라 나타난다.DB는 근로자가 받을 급여를 사전에 확정한다. 사용자는 확정된 급여를 지급할 수 있도록 노력할 의무를 진다. 적립금의 자산운영 실적이 예상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사용자의 부담금 규모가 증가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감소하는 것이다.반면 DC의 경우 사전에 확정되는 것은 근로자가 받을 급여액이 아니라 사용자가 부담할 적립금액이다. 사용자는 일정한 액의 보험료를 납입할 의무를 지고 근로자는 이를 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주식이나 채권 등 적립금의 투자대상을 근로자가 정할 수 있는 것이다. 투자에 대한 수익이 많으면 급여가 많아질 것이고 반대의 경우 손해를 볼 수 있다. 설혹 손해를 본다 해도 사용자가 부담할 보험료가 올라가는 일은 없다.중간인출ㆍ담보대출 가능어떤 제도를 선택하든 노사는 퇴직연금제도 전반을 규정하는 ‘퇴직연금규약’을 작성해야 한다. 보장법은 이 규약에 반드시 포함돼야 하는 사항을 정해두고 있다. 퇴직연금제도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노사간 또는 사용자와 퇴직연금사업자와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마찰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DB의 경우 미래에 받을 급여액을 확정해야 한다. 보장법은 근로자가 퇴직한 후 수령하는 일시금의 액수를 기준으로 급여액을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근로자가 퇴직할 때 수령하는 일시금의 액수는 계속근로기간 1년에 대해 30일분의 평균임금에 상당하는 금액 이상이어야 한다.재정건전성 확보에 대한 규약도 정해야 한다. 연금 급여에 대한 최종책임이 사용자에게 있다지만 기업의 도산 등 사실상 급여를 책임질 수 없는 경우에 대비해 근로자의 연금수급권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장치다.DC를 선택한 사업장의 사용자는 가입자의 연간 임금총액의 12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금액을 현금으로 부담해야 한다. 사용자가 내는 것 외에 가입자는 추가로 부담금을 낼 수 있다.반대로 일정한 사정이 생겼을 경우 가입자는 적립금을 중도에서 인출할 수 있다. 하지만 무주택자인 가입자의 주택구입, 가입자 또는 부양가족의 6월 이상의 요양, 천재지변 등 중간인출 사유는 엄격히 제한된다. DB의 경우 같은 사유가 발생했을 때 수급권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을 뿐 인출할 수는 없다.퇴직연금은 55세 이상 10년 이상 근속자에게 지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보장법은 10년 이하의 단기근속자라도 퇴직연금과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장치인 ‘개인퇴직계좌’(IRA) 제도를 마련해 뒀다. 최근 직장인들의 평균 근속기간이 5.6년에 불과할 정도로 단기근속자가 증가하고 있는 데 따른 조치다.IRA는 직장을 옮길 때 받은 퇴직금을 IRA계좌에 적립하면 퇴직연금과 동일하게 운영되는 제도다. 과세가 연금 수급시까지 이연되고 수급권도 보장된다. 다만 적립금을 운영할 퇴직연금사업자는 가입자 스스로 선정, 위탁계약을 맺어야 한다. 계약내용은 DC와 동일하다. IRA 가입은 의무사항이 아니므로 원하지 않으면 가입하지 않아도 된다.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에 따라 퇴직연금 적립이 중단 또는 폐지되는 경우 근로자는 어떤 영향을 받을까. 보장법은 근로자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규정을 두고 있다. 사용자는 연금이 중단 또는 폐지되기 이전의 적립금을 근로자에게 퇴직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또 DB의 경우 근로자에게 귀속된 급여액이 퇴직금제도가 보장하는 액수보다 적다면 사용자는 그 차액을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한다. 만약 사용자가 이를 부담할 형편이 아니라면 ‘임금채권보장제도’에 의해 일정 한도 내에서 대지급을 받을 수 있다.퇴직연금제도의 큰 틀은 짜여 졌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보장법은 노동부에 ‘퇴직연금심의위원회’를 두고 퇴직연금제도의 운영과 개선에 대한 주요사항을 논의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위원회는 노사정 및 공익을 대표하는 자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