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인력 영입·전산시스템 개발·기업확보 물밑경쟁

퇴직연금시대의 개막은 금융권에는 절대 놓칠 수 없는 메가톤급 호재다. 은행권에서는 방카슈랑스를 능가하는 블루오션으로, 보험사들은 은행에 빼앗긴 시장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로, 증권사와 투신운용사는 새롭고 막강한 캐시카우로 퇴직연금시장을 바라보고 있다. 주종목은 각기 다르지만 퇴직연금으로 유입될 자금을 끌어들여 수익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선 생각이 같다. 각사마다 퇴직연금 태스크포스팀(TFT)을 만들어 퇴직연금 유치에 나서는 한편 시스템 개발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 모습이 뚜렷하다.금융권에서는 퇴직연금시장 규모가 5년 후인 2010년께면 적어도 50조~100조원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기존 보험사의 퇴직보험과 은행의 퇴직신탁 등에서 17조4,000억원 정도를 이미 유치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 예상치다. 특히 2008년 이후 5인 미만 사업장까지 퇴직급여제도 의무화가 시행되면 퇴직연금시장 규모도 크게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게다가 기존 퇴직신탁이나 보험이 2010년 12월 말에 종료되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시장규모가 200조원까지 확대될 것이란 낙관론을 내놓기도 한다. 그만큼 ‘꿈의 시장’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다.하지만 올해 첫 시행되는 제도인 만큼 혼선도 적잖다. 특히 어느 금융기관을 막론하고 전문인력 영입에 애를 먹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나마 DB형에 업무경험이 있는 보험계리사는 스카우트 0순위로 꼽힌다. 미국, 일본 등지에서 퇴직연금업무 경험을 쌓은 외국인 전문가의 영입도 이어지고 있다.홍보 및 인식 부족에 따른 어려움도 만만찮다. 대기업들도 제도 시행 이후에나 검토하겠다며 관망하는 입장이어서 실제 퇴직연금 유치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란 예상이다. 대형업체들을 중심으로 기업 대상 설명회가 시작됐지만 반응은 그리 신통찮다는 평이다.이 때문에 정부정책 호응도가 높은 공기업 공략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외부에 예치할 공기업의 퇴직금 충당금 규모는 5조~7조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추산돼 이를 먼저 유치하는 쪽이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공기업 한 곳만 유치해도 수천억원이 유입되는 것이라서 저마다 ‘모시기 경쟁’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면서 “곧 공기업 유치경쟁이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은행권기존 신탁, 연금 관련 부서에서 경험을 쌓은 직원을 차출하거나 외부영입을 통해 전담팀을 설치하는 등 발빠른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대형사업장은 물론 5인 안팎의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안전성’과 ‘다양성’을 강조하는 유치전략을 펴고 있다. 주요 거래기업들을 방문, 미리 네트워크를 확인하거나 자사의 상품을 설명하는 등 사전 마케팅도 활발하다.국민은행은 지난해 5월 연금사업파트를 구성하고 총 8명의 인원을 배치했다. 외부에서 보험계리사와 컨설팅 전문인력도 영입했다. 지난해와 올 초에는 일본과 미국의 퇴직연금 관련 기관과 선두기업을 방문, 노하우를 벤치마크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지난 7월부터는 삼성SDS와 함께 전산시스템 개발에 나서면서 대외활동도 활발하게 펴고 있다. 전담부서 구성 전부터 참여한 한국노동연구원 퇴직연금 공동작업반을 비롯, 금융감독원과 기록관리기관, 은행연합회 등의 공동작업반에 적극적으로 참여 중이다. 이명규 차장은 “TFT 구성에 이어 전문인력 영입, 전산시스템 개발, 직원교육, 상품개발 등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면서 “보험상품에 비해 다양한 상품구색을 갖출 수 있는 만큼 원금보장이 되는 DB형뿐만 아니라 실적배당인 DC형 상품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우리은행은 지난 3월부터 신탁사업단 내에 퇴직연금 TFT를 만들고 5명의 전담인원을 배치했다. 이와 더불어 금융결제원 퇴직연금 전산시스템 개발 컨소시엄에 참여 중이다. 조만제 차장은 “주요업체를 방문, 소규모 설명회를 열고 있다”면서 “기업들이 추이를 보겠다는 입장인 만큼 제도 시행까지 철저한 사전준비와 직원교육에 매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다른 은행들도 움직임은 비슷하다. 전담팀을 중심으로 전문가 영입작업에 나서는 한편 기업을 상대로 한 퇴직연금 프레젠테이션을 강화하고 전산시스템 및 상품개발을 병행하는 형태다. 영업점 교육시 퇴직연금제 관련 프로그램을 신설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하나ㆍ외환은행은 퇴직보험 관련 전문인력을 스카우트하고 전담부서를 강화하는 한편 기업체를 직접 방문, 퇴직연금제도 설명과 정보제공을 하는 홍보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신한ㆍ조흥은행도 지난 7월부터 공동으로 TFT를 구성, 전산시스템 구축과 상품개발에 나선 상태다.보험업계퇴직연금시장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보험사들은 기존 퇴직보험 및 신탁시장에서의 우위를 지키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현재 퇴직보험 및 신탁시장 점유율은 보험사가 84%, 은행이 16%로 크게 앞서고 있는 상태다.특히 신규수요뿐만 아니라 기존 수요의 유지 및 확대에도 기대가 크다. 2010년이면 퇴직보험 및 신탁상품의 판매가 종료돼 기존 수요가 퇴직연금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퇴직보험 계약을 맺고 있는 대기업들을 고스란히 퇴직연금 계약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보험업계의 공통된 목표다. 따라서 보험사들은 저마다 ‘수성’ 전략을 펴면서 기존 퇴직보험시장을 주도한 노하우와 영업력을 십분 발휘하겠다는 각오다. 중소형 보험사의 경우 퇴직연금 유치를 성장의 관건으로 볼 만큼 중요한 전환점으로 인식하고 있다.보험업계도 은행권과 마찬가지로 영업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담팀 구성과 외부전문가 영입, 전산시스템 개발, 상품개발 등을 동시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제도 시행까지 기업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기초 토양 일구기에 적극 나선다는 계획이다.생보업계 선두주자인 삼성생명은 지난해 2월 업계에서 가장 먼저 기업연금 TFT를 구성하고 외국에서 전문가를 대거 영입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다. 전담부서 16명에 컨설팅 전문인력 8명이 합류, 가장 탄탄한 인력구성을 자랑한다. 특히 미국 정계리사 자격자로 36년간 퇴직연금을 운용한 경험이 있는 조지 베람 고문을 영입하고 캐나다, 일본 등에서도 전문인력을 스카우트해 눈길을 끈다.삼성생명은 기존 퇴직보험시장에서도 6조4,000억원을 유치, 33%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유장혁 파트장은 “퇴직보험에서 쌓은 노하우와 영업력이 퇴직연금시장에서 파워를 더할 것”이라면서 “10여년 전부터 퇴직연금과 관련해 정부와 업계의 의견조율을 해 온 만큼 어느 업체보다 철저한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삼성생명은 현재 삼성화재, 삼성증권과 함께 공동 전산시스템 개발에 착수, 시너지 효과 높이기에 나선 상태다. 또 상품구성과 마케팅 등 부문별 전략수립에서도 힘을 합치고 있다. 전국 221개 기업을 대상으로 퇴직연금 관련 조사를 펴는가 하면 일본, 미국 등 선진국의 퇴직연금제도와 상품 연구에도 힘을 쏟고 있다. 특히 퇴직보험 경험이 풍부한 컨설턴트가 직접 기업 실무 담당자를 만나 퇴직연금 운용에 관한 상담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차별화된 시장선점 전략을 선보이는 중이다.교보생명도 지난해 전담팀을 구성하고 지난 4월부터는 자체 전산시스템 개발에 착수했다. 하반기 들어서는 각종 세미나와 기업 대상 설명회를 여는 등 사전 마케팅을 강화하는 중이다. 이밖에 중소형사들은 보험개발원을 중심으로 공동시스템 개발에 착수한 상태다. 보험개발원 컨소시엄에는 대한·흥국·미래에셋·금호·신한·동부생명과 현대·동부·LG·동양·제일·신동아화재 등 총 12개사가 참여하고 있다.외국계 보험사 역시 관심이 지대하다. ING생명의 경우 기업연금 전담부서를 구성하면서 부사장급 1명을 네덜란드 본사에 파견했다. 퇴직연금 노하우 습득과 상호 업무 조정을 위해서다. 또 지난 6월에는 세미나를 열고 세계 각국에서 쌓은 연금시장 노하우를 한국시장에 접목, 개인퇴직계좌(IRA)와 확정기여형(DC)에 특별히 관심을 쏟을 것이라고 밝혔다. 노구미 마케팅부 차장은 “ING가 세계 기업연금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만큼 한국에서도 노하우를 십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면서 “전문적인 자문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상품개발과 기금운용에 적극 참여해 퇴직연금시장 발전에 일조할 것”이라고 말했다.증권ㆍ투신권퇴직연금시장 개막은 여의도 증권가에도 호재로 작용한다. 수익구조를 다변화하는 또 하나의 무기로 손색이 없어서다. 일각에선 ‘블루오션’이란 단어까지 사용하며 군침을 삼킨다. 고유의 상품운용 경험ㆍ노하우가 자신감의 배경이다. 실제로 신탁업이 허용된 증권ㆍ투신권은 퇴직연금시장 개막의 최대 수혜자로 손꼽힌다. 증권가 특유의 장점만 잘 살린다면 얼마든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다.시장장악을 위한 물밑전쟁도 치열하다. 본격적인 레이스는 지난해 12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 통과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각 증권ㆍ투신사들의 선점경쟁은 눈에 띄게 격화됐다. 대형ㆍ외국사는 물론 중소형사까지 출사표를 속속 던졌다. 별도의 TFT를 세팅하거나 아예 전담부서를 만들어 관련업무를 독려 중이다. 적게는 2~3명에서 많게는 10명 이상이 퇴직연금에 매달린다. 특히 외국계의 필승의지가 위협적이다. 국제무대에서 쌓은 노하우와 막강한 자본력이 파워의 원천이다.다만 아직은 ‘폭풍전야’다. 제도시행이 올 12월1일부터인데다 여전히 상품규정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안만 있을 뿐 구체적인 윤곽은 명확치 않다. 상품설계도 여의치 않다. 지난 8월 말 발표된 세재개편안에 4가지 세제혜택이 정해질 만큼 속도도 늦다. 상품출시는 감독규정이 확정될 9월 말 이후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퇴직금이라는 중요자금을 운용하는 사업인 까닭에 안전장치 강화에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평가한다. 주관부서인 노동부도 최종확정안 마련에 신중한 입장이다.결국 경쟁포인트는 프리마케팅으로 요약된다. 시장 개막 전에 잠재고객을 발굴해 일찌감치 눈도장을 찍어둔다는 전략이다. IB(투자은행)ㆍ법인영업ㆍ자산관리 등 관련 임직원이 사전 영업활동의 전위부대로 뛰고 있다. 다만 관계유지 차원의 접근으로 제도에 대한 설명ㆍ홍보 정도에 머무른다. 이혁근 한국투자증권 신탁사업추진단 퇴직연금팀장은 “이미 법인고객 10만개 정도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며 “9월 서울지역부터 세미나를 개최해 시장선점에 나설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재무제표에 퇴직충당금이 100억원 이상인 600여개 기업이 메인 타깃이라고 덧붙였다.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까지 방문해 밀착마케팅을 펼치는 곳도 많다.업계는 합종연횡에도 열심이다. 시너지 효과의 창출을 위해 앞다퉈 연합작전을 펼친다. 특히 은행ㆍ보험사와의 협조가 대세다. 현재 은행ㆍ보험사는 퇴직연금과 비슷한 ‘퇴직신탁ㆍ보험’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증권사 입장에선 이 노하우를 빌리겠다는 의도다. 은행ㆍ보험사로서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퇴직연금이 시작되면 이 상품들의 존재가치가 희박해져서다.‘증권+은행ㆍ보험’에는 계열ㆍ관계회사가 총동원된다. 삼성증권은 삼성생명과 공동준비에 나섰다. 우리ㆍ굿모닝신한ㆍ하나 등 금융지주회사도 마찬가지다. 대우증권도 기존의 퇴직신탁 상품규모 1위인 산업은행과 보조를 맞춘다는 계획이다. 한편 몇몇 소형증권사는 채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예 시장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규모가 영세한 자산운용사도 비슷한 처지다. 자산운용사는 상품개발ㆍ운용에 초점을 맞춰 중비 중이다.증권사의 최대 장점은 상품운용 경험이다. 김홍욱 대우증권 사업기획팀장은 “확정급여형은 증권사가 강할 수밖에 없다”며 “퇴직연금 상품은 적립식저축과 비슷한 개념으로 전산ㆍ운용 경험이 큰 힘이 된다”고 분석한다. 이밖에 다른 조건은 사실 은행ㆍ보험이 낫다는 평이다. 보험사는 기존고객을 다뤄봤고, 은행은 주거래은행의 메리트가 작용한다. 반면 증권사는 신규시장 개척이다. 칼자루를 쥔 기업ㆍ노조를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다.한계도 있다. 윤곽이 드러난 초안에 따르면 직접투자가 불가능하고 간접투자도 40%(주식형 편입비중)의 제한을 받는다. 상품개발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신규업무인 탓에 전산 등에 거액의 초기투자자금이 들어간다는 점도 부담스럽다. 품도 많이 든다. 단순한 상품가입ㆍ유치에서 벗어나 고객(근로자)교육과 가입ㆍ퇴직 때의 별도관리가 필수다. 당장 내년부터 증권가가 퇴직연금의 수혜를 입을 것으로 보기 힘든 이유다. 때문에 시장 초기 주도권은 보험 쪽이 쥘 공산이 크다. 또 증권ㆍ투신사 중에선 대형사 위주로 판이 벌어질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