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전박대에도 거래처 10번 이상 방문 … ‘한국 최고 건설사 만들 터’

약력: 1953년생. 72년 양양여고 졸업. 2000년 강원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94년 세원토건 대표이사(현). 2001년 한성종합건설 대표이사(현). 2002년 한국여성경제인협회 강원지회 회장(현)강원도에서는 건설업으로 크게 성공한 이금선 세원토건 사장(52)을 일컬어 ‘의지의 화신’으로 부른다. 사업경험은커녕 집에서 살림만 하던 주부가 남편의 유산(건설업체)을 물려받아 알토란같은 회사로 키워냈으니 그런 소리를 들을밖에.이사장이 사업에 뛰어든 건 1994년 1월. 당시 세원토건을 경영하던 남편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부터다. 갑작스러운 일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무엇보다 ‘남편이 이뤄놓은 사업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절실함으로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은 것이다.‘여자가 무슨 건설업을 해?’ ‘곧 망할 거야’ 등 주변의 시선은 부정적이었다. 그녀 자신도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기만 했다. 현장에서 흔히 쓰이는 건설용어도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그렇다고 집무실의 푹신푹신한 의자에만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건설업의 성패는 공사수주에 달린 것이기에 영업현장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낮에는 거래처를 찾아다니고 밤에는 전문지식을 익히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이러다 보니 밤낮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토요일, 일요일을 반납한 것은 물론이다. 예상한 일이기는 하나 거래처에서는 초보 여성기업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회사의 강점을 설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외판원이나 보험설계사인 줄 착각하고 쫓아내는 경우도 허다했다.그렇게 뒤돌아설 때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4년간 그랬다. 거래처의 문전박대에도 그녀는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열 번 이상씩 거래처를 찾았다. 집념은 강철보다 강한 법이다. 차츰 그녀를 보는 눈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야무진걸, 그럼 한번 맡겨볼까’ 하는 업체들이 하나 둘 생겨난 것이다.그녀는 어렵게 잡은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한 치의 빈틈없이 완벽하게 일처리를 했다. 업계에서 ‘이사장에게 맡기면 하자가 없다’는 소문이 소리 없이 퍼져나갔다.기업경영은 대외관계뿐만 아니라 조직관리에서도 노하우가 필요하다. 직원들이 ‘사모님’에서 ‘사장님’으로 변신한 그녀를 미심쩍어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누구 하나 선뜻 나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막막함에 고민하던 그녀는 “그래 여성이자 어머니로서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자”고 마음을 다잡는다.직원들을 가족이라 여겼다. 집이 없는 직원에게는 임대아파트를 지급할 정도로 중소기업으로서는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여성이라 해서 공사현장을 피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강릉 고속도로 방풍벽 공사를 할 때는 눈보라 속에서도 현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밤을 꼴딱 새웠다.이렇게 되자 직원들의 자세도 자연스레 달라졌다. 지금은 직원들 사이에서 “그 어느 사장보다 우리 사장이 가장 뛰어나다”고 입을 모을 정도가 됐다.사업이 승승장구하면서 남편이 남기고 간 세원토건은 물론이고 대영토건, 한성종합건설까지 회사가 3개로 늘어났다. 매출규모는 그때보다 10배 이상 늘어났다. 2002년에는 한국여성경제인협회 강원지회 회장도 맡아 지금까지 지역 여성CEO들의 대모 역할을 해왔다.그녀의 향후 비전은 한국 최고의 종합건설회사로 도약하는 것이다. 현장 직원들과 기술자들의 복지 수준을 국내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목표 중의 하나다.그다음 평생숙원이기도 한 사회사업을 하는 것이다. 고아원, 양로원도 짓고 학교도 만들어 그간의 땀 흘린 결과물을 값지게 쓰겠다는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