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씨 등 전직 대통령 가운데 한국경제에 공헌도가 가장 높은 사람은 누구일까. <한경비즈니스>가 국내 경제전문가들에게 물었더니 전직 대통령 중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최고의 ‘경제 대통령’으로 꼽았다.설문(복수응답 가능)에 응한 경제전문가 35명 중 22명이 박 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그 다음으로 11명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2위에 오르며 만만찮은 저력을 보여줬다. 이밖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1표를 얻었을 뿐,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단 한 표도 얻지 못하며 낙제점을 받는 수모를 당했다.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나란히 1ㆍ2위를 차지한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다. 김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로 부도가 난 국가경제를 회생시켰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백락일고(伯樂一顧ㆍ재주 있는 사람도 그 재주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야 빛을 발한다)라 했던가.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경제관료들 중에서 최고는 어떤 사람들일까.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가정교사 역할을 수행하며 80년대 초반 경제개혁을 이끈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경제위기의 해결사’, ‘구조조정의 달인’ 등으로 불리는 이헌재 전 부총리가 가장 많은 추천수를 기록했다. 김수석과 이부총리는 30명의 경제전문가들 중에서 각각 9명의 추천을 받았다. 남덕우 전 총리, 조순 전 부총리, 김종인 전 경제수석(이하 2표) 등이 뒤를 이으며 만만찮은 저력을 과시했다.지난 83년 미얀마 아웅산에 숨진 김재익 전 수석은 2003년 삼성경제연구소에서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이라는 20주기 추모기념집을 출간할 정도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이헌재 전 부총리는 외환위기가 낳은 ‘스타’로 국민의 정부 출범 뒤 첫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중용돼 은행퇴출과 재벌개혁 등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을 강도 높게 추진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박수를 받았다.참고로 이 같은 결과는 <한경비즈니스>가 올 초 글로벌리서치와 함께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20세 이상 성인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경제에 기여한 경제관료’ 결과와는 다소 차이를 보인 것이다(474호 참조). 당시 조사에서는 조순 전 부총리가 1위에 올랐으며 이헌재, 진념, 김만제, 김진표 전 부총리 순으로 뒤를 이었다. 최각규, 임창열, 서석준, 강봉균, 박승 한은총재 등이 나머지 ‘톱10’ 자리를 꿰찼다. 이번 조사에서 1위에 오른 김재익 수석은 11위에 그치며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는 일반 국민들의 정서와 경제전문가들의 시각차이로 풀이된다.그럼 각 정권별로 대통령의 경제정책과 유능한 경제관료들의 면면을 살펴보자.‘박정희 정권’ 시절은 한국경제가 거대한 용틀임에 들어선 시기였다. 박 전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적잖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한국경제 초고속 성장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만은 분명하다는 것이 경제전문가들의 주장이다.적어도 양적인 성장만을 놓고 볼 때 박 전 대통령 집권기의 경제성적은 가히 경이적이다. 5ㆍ16쿠데타가 일어난 61년 8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79년 1,636달러로 20배나 불어났다. 이 기간에 한국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9.3%에 이를 정도로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계속했다.박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은 ‘수출형 공업화’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산업화의 기반을 조성하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한 것은 한국경제가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원동력이 됐다. 창원공업단지, 울산 현대조선소, 구미전자단지, 울산석유화학단지 등이 이때 조성된 곳들이다.물론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지금의 경제발전은 이뤄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경제개발계획이 5ㆍ16쿠데타 이전인 2공화국 시절에 세워졌다거나 경제기획원 설립 구상도 2공화국 때 이미 마련돼 있었다는 것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아울러 재벌을 경제발전의 ‘첨병’으로 활용하면서 부의 편중화가 심화되고, 강력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국가 주도의 성장전략을 수립하다 보니 정치적 민주주의가 축소되는 등 값비싼 비용을 지불했다는 비판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정책을 주도한 자리는 경제부총리였다. 당시 예산권을 쥔데다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힘 있는 정책 추진이 가능했다. 경제부총리 제도가 생긴 것은 64년 5월이다. 초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장기영씨였다. ‘왕초’, ‘개발불도저’ 등으로 불린 장씨는 67년 10월까지 부총리로 일하며 수출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을 확고한 정부 정책으로 자리매김했다. 김학렬 전 부총리도 장 전 부총리와 더불어 ‘박정희식 경제모델’의 기초를 닦은 핵심인물에 속한다.박 전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에는 남덕우 경제부총리가 경제관료의 총수로 경제개발을 진두지휘했다. 남 전 부총리는 서강대 교수를 하다 재무부 장관을 거쳐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인물로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훗날 그의 뒤를 이어 서강대 교수가 줄줄이 부총리와 장관으로 입각하자 ‘서강학파’라는 말이 생겼다.중화학공업 육성과정에서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2수석의 역할을 빼놓을 수가 없다. 오 전 수석은 71년부터 79년까지 경제2수석으로 있으면서 박 전 대통령에게 중화학공업 육성의 필요성을 설득해 중화학공업 정책을 입안하고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까지 지냈다.전두환 정부가 탄생한 80년 초반 한국경제는 그야말로 ‘사면초가’나 다름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전씨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던 80년 경제성장률은 -2.1%에 불과했으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에 이르렀다. 경상수지는 53억1,200만달러라는 대규모 적자를 냈으며 실업률은 5.2%에 달했다. 거의 모든 경제지표가 바닥을 긴 셈이다.이에 따라 전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안정성장’에 초점을 맞췄고 흔히 경제성장, 물가안정, 국제수지 흑자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고 말할 정도로 상당한 성공도 거뒀다. 집권 초기인 82년부터 87년까지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3.5%에 지나지 않았다.‘전두환 정권’에서 가장 돋보이는 경제관료는 역시 83년 미얀마 아웅산에서 순직한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다. 과천 관가에서도 역대 경제수석 가운데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람으로 김 전 수석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온 김 전 수석은 한국은행에 근무하며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석사,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다시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까지 따낸 학구파 관료다.지난 74년 당시 남덕우 부총리의 추천으로 경제기획원으로 자리를 옮겨 경제기획국장 등 요직을 거치며 기계식 전화교환기를 전전자교환기로 바꾸는 일을 주도, 정보기술(IT)산업의 초석을 닦았다.5공화국이 들어서자 국가보위 입법회의 경과위원장을 거쳐 80년 8월 파격적으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된다. 당시 나이 42세였다. 그는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5공 경제정책의 기조를 만들었다.노태우 대통령의 시작은 매끄러웠다.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성장가도에 있는 경제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87년 말 경상수지는 100억5,400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취임 첫해인 88년에도 145억달러를 기록하며 ‘풍년가’를 불렀다. 그러나 취임 말기인 92년 노태우 정부는 39억4,300만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냈고, 한때 900을 넘었던 주가지수도 93년 2월 668.8로 취임 초기 수준으로 가라앉았다.노태우 정권 시절 대표적인 경제관료는 88년 12월부터 90년 3월까지 경제부총리를 지낸 조순씨를 꼽을 수 있다. 조 전 부총리는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그에게 경제학을 배운 제자들이 한국경제 각 분야에 골고루 포진, 산업화시대에 큰 역할을 했다. 88년 당시 노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외부압력에 영합하지 않고 뚝심 있게 정책을 추진하는 등 ‘포청천의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책 추진력이 약하고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임기 내내 그를 괴롭혔다.김영삼 대통령은 ‘경제의 문외한’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질 정도로 경제정책에 관해서는 낮은 점수를 받았다. ‘세계화’를 외치며 개방과 국제화에 나섰고 경제선진국들의 모임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폼만 그럴 듯했을 뿐 97년 ‘외환위기를 초래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역사에 남기게 됐다.이러다 보니 뛰어난 경제관료를 배출하지도 못했다. 이경식, 홍재형, 나웅배, 정재석, 한승수, 강경식, 임창열씨 등 ‘김영삼 정부’ 경제부총리의 평균 재임기간이 8.6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재임기간이 짧다 보니 부총리들이 업무파악을 마칠만 하면 물러나 경제운용도 부실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김대중 정부가 남긴 최대 치적은 ‘IMF 관리체제 탈출’이다. 각종 경제지표도 ‘합격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출범 초기 바닥(40억달러)을 드러냈던 외환보유액을 1,000억달러 이상으로 채웠고 적자에 시달렸던 국제수지도 흑자로 되돌렸다. 기업ㆍ금융부문을 대상으로 한 강력한 구조조정이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경제성장률은 IMF 관리체제에 들어선 첫해인 98년에 6.7%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으나 이듬해인 99년 10.9%로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2000년에도 9.3% 성장을 지속했다. 2001년과 2002년에는 세계경기 침체 속에서 각각 3%와 6% 성장세를 유지했다.이외에도 ‘저금리 기조’가 정착된 것도 김대중 정부의 중요한 경제치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신용카드 정책을 비롯해 경기부양을 위한 과도한 정책은 신용불량자 양산과 부동산가격 폭등 등의 부작용을 낳았다. 국민의 정부에서 가장 활약이 뛰어났던 관료는 이헌재 전 부총리다. ‘구조조정의 달인’, ‘경제위기 해결사’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서울대 법대를 나와 행정고시(6회)를 수석으로 합격한 뒤 재무부 이재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뒤 한때 승승장구했으나 79년 재무부 재정금융심의관으로 재직하던 중 옷을 벗는 등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으로 발탁되면서 급부상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첫 금융감독위원장을 맡아 구조조정을 강도 높게 추진하면서 국내외에서 인정을 받게 된다.2000년 1월 재경부 장관으로 영전했으나 당시 권력 내부의 역학관계에 밀려 7개월 만에 물러나야 했다. 참여정부가 들어서며 2004년 2월 다시 재경부 장관으로 영입됐으나 이번에는 20년 전의 ‘부동산거래’에 발목이 잡혀 낙마하고 말았다.한편 이승만 전 대통령도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이한구 수원대 교수(경제사)는 “이 전 대통령이 자본주의 교과서적인 경제정책을 통해 기업이 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며 한국경제 발전과정에서 이 전 대통령을 제외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광복과 함께 일본기업, 은행 등이 모두 정부 재산으로 귀속됐는데, 이를 시장경제원리의 관점에서 처리한 것이 주효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