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1 = 지난 7월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재정경제부가 상정한 ‘금융산업구조개선법률’(금산법) 개정안을 논의할 순서가 되자 노무현 대통령이 대뜸 “일부 부칙조항이 삼성생명과 삼성카드의 계열사 지분 불법보유에 면죄부를 준다는 지적이 있다”며 한덕수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에게 설명을 지시했다.갑작스러운 질문에 한부총리가 머뭇거리자 노대통령은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에게 설명하도록 했다. 이위원장은 재경부 개정안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노대통령이 금산법 개정안에 삼성과 관련된 논란거리가 포함돼 있다는 걸 안 것도 국무회의 직전 이위원장이 귀띔했기 때문이다. 곡절 끝에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긴 했으나 한부총리로서는 스타일을 구긴 셈이다.#장면2 = 지난 7월1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경제자문회의. 회의를 주재한 노대통령은 “경제 전반의 일차적 조정역은 경제부총리가 맡아야 한다”며 한부총리를 치켜세웠다. 노대통령은 경제부총리의 위상이 흔들린다는 일부 지적을 의식한 듯 “참여정부 초기에는 경제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고 판단해 경제정책을 결정하고 지시하는 일이 많았으나 요즘은 경제부총리에게 맡기고 있다”고 말했다. 한부총리는 열흘 전 구겼던 체면을 이날 좀 회복하는 듯했다.#장면3 = 지난 7월27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상황 점검 및 정책협의회’. 한부총리는 “현재 경제성장의 걸림돌은 투자부진이며 이를 해결하려면 규제완화와 노사갈등 해소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규제를 완화해주고 노사갈등이 해결되면 기업들이 투자를 할까요”라며 반론을 제기했다.다음날인 28일 제주도 신라호텔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로 열린 ‘2005년 하계포럼’에서 한부총리는 기업들을 몰아붙였다. “투자부진 이유는 규제 때문이 아니라 (기업들의) 수익모델이 없기 때문이 아니냐. 투자가 안되는 이유로 출자총액규제 등을 내거는 건 (정부에 대해) 데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누구보다 규제완화를 중시하던 시장주의자, 한부총리의 난데없는 질타에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되살아날 듯, 말 듯한 경기가 화끈한 회복세를 보이지 않자 ‘경제정책의 결정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특히 지난 3월 한덕수 경제부총리 취임 후 “경제가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다”는 불만이 쌓여가면서 그런 목소리들이 더욱 커지고 있다. 요컨대 경제부총리 지휘 아래 일관되고 짜임새 있는 경기진작책 등 경제정책이 강력히 추진되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일부에서는 “요즘 경제정책을 과연 누가 결정하느냐”는 의문까지 제기하기도 한다. 실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조차 “나라의 경제 리더십이 실종됐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경제정책에 대한 상반된 이해를 조정하며 경제운용을 책임지고 이끌어갈 컨트롤타워가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이 같은 경제정책 컨트롤타워의 실종, 경제팀장의 허약한 역할은 정책 불확실성과 불신을 야기하고, 그것이 가뜩이나 가라앉은 경제심리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게 시장의 시각이다.경제정책 수장인 한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재경부의 컨트롤타워 기능이 취약해진 데는 몇가지 원인이 있다.첫째, 경제정책 결정을 둘러싼 사공이 너무 많다. 청와대만 해도 대통령 자문기구인 정책기획위원장이 있고, 정책실장이 따로 있다. 직제상 정책기획위원장은 중장기 국가과제를 다루는 것으로 돼 있으나 지난 7월5일 국무회의 장면에서 볼 수 있듯 경제 현안에 대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더구나 그 자리를 얼마 전 자진해 그만둔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이 맡았다는 점은 경제부총리에게 큰 부담이었다. 이 전 위원장은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오랜 경제참모다. 대학교수 출신의 김병준 정책실장도 마찬가지다.“과거 정부 때는 청와대의 경제정책 참모가 경제수석으로 일원화돼 있고, 대개 경제수석은 재경부 출신 관료가 맡아 경제부총리와 호흡을 같이해 왔다. 간혹 경제수석이 경제부총리를 도와 청와대 내에서 부총리의 입지를 넓혀주는 역할도 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책기획위원장이나 정책실장이 개혁성향의 학자 출신이다 보니 경제 현안과 관련해 재경부와 입장 및 견해가 충돌하는 것들이 적지 않다”며 익명을 요구한 재경부 간부의 설명을 들어보면 경제부처와 청와대 참모간의 관계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청와대뿐 아니다. 실제 국무총리도 경제부총리의 힘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노대통령이 이해찬 총리에게 힘을 잔뜩 실어줘 웬만한 경제문제도 총리가 직접 챙기는 사례가 많다. 그래서 이총리는 ‘경제총리’로도 불린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부동산 종합대책이 대표적이다. 오는 8월31일 발표를 앞두고 매주 수요일 저녁에 열리는 부동산 정책 당ㆍ정협의회는 늘 이총리가 총리공관에서 직접 주재한다.한부총리는 명색이 경제수장이지만 그저 정부측의 인사 중 한 명으로 참석할 뿐이다. 더구나 한부총리는 부총리 취임 직전 국무조정실장으로 이총리를 직접 ‘모셨던’ 터다. 이처럼 이총리가 핵심 경제정책 결정에 깊숙이 관여하자 관가에서는 “이총리가 경제부총리를 직속 기관장으로 두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여기에 노대통령의 당ㆍ정분리 원칙에 따라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그렇다. 다른 건 몰라도 경제정책에 관한 한 여당은 종종 정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곤 한다. 정부와 여당의 경제정책이 일사분란하게 조율되고 추진되지 않는 것처럼 비쳐지는 이유 중 하나다.둘째, 대통령이 경제부총리에게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주지 않는 것도 원인이다. 노대통령은 장관들과 독대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정인과 독대를 하면 그 사람에게 힘이 쏠리고 그러면 건전한 토론과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론 때문이다. 실제 한부총리는 물론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도 노대통령과 한 번도 독대를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다 보니 경제수장으로서 경제부총리에 힘이 실리지 않고 있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경제부총리는 형식상 경제장관들이 모두 참석하는 정책협의체인 경제정책조정회의를 주재하지만 대단한 법적 권한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경제부총리가 다른 경제부처를 총괄지휘하며 경제정책을 추진하려면 스스로 엄청난 실력과 카리스마가 있든지, 아니면 대통령이 독대 등을 통해 분명히 힘을 실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경제장관들이 경제부총리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해도 어쩔 수 없다.” (경제부처 국장)셋째, 한부총리의 지나친 ‘눈치 살피기’가 문제란 지적도 있다. 청와대, 총리실, 여당 등 여기저기에 눈치 볼 시어머니가 많다 보니 경제부총리가 자기 소신을 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한부총리도 자기 소신보다는 청와대 의중과 코드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한부총리가 지나치게 대통령이나 청와대 실세 참모들과 코드를 맞추려는 게 문제의 본질이다. 참여정부에 ‘지분’이 없는 부총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자기 철학이나 소신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려 하기보다는 코드를 맞추는 데만 급급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정부 내에서 쇳소리는 나지 않고 평온한 것 같지만 경제정책이 한쪽 코드로만 흐르는 문제가 생긴다. 더 큰 문제는 그 ‘한쪽 코드’가 경제논리보다는 정치ㆍ사회적 논리가 중시돼 경제활성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전직 경제부처 장관)물론 한부총리의 독특한 업무 스타일이 그런 ‘오해’를 불렀다는 해석도 있다. 전임 이헌재 부총리와 달리 카리스마가 부족한 것으로 지적되는 한부총리는 ‘조용한 조화의 리더십’을 강조한다.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기보다는 조화와 균형을 통한 정책결정을 중시한다.실제 한부총리는 여러모로 나서지 않는 부총리다. “실질적인 일의 진행이 중요하지 내가 폼 잡는 건 중요하지 않다”는 게 한부총리의 생각이다. 때문에 그는 매주 박승 한국은행 총재,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 김영주 청와대 정책수석 등과 서울 명동 은행회관 뱅커스클럽에서 조찬을 겸한 비공식 ‘4인 회의’를 열어 주요 경제 현안을 조율하고 조정하면서도 한 번도 그 실적을 드러내지 않았다.‘4인 회의’에서는 한은과 재경부가 종종 충돌했던 저금리 유지 문제를 비롯해 부동산대책, 외국인투자 규제완화 문제 등 핵심 현안들이 조율돼 왔다. 근래 경기 진작을 위한 저금리 유지에 재경부와 한은이 마찰 없이 손발을 척척 맞추고 있는 것도 이 같은 한부총리의 막후 조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후문이다.그래서인지 한부총리는 ‘경제수장으로서 너무 자기 목소리가 없다’는 비판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카리스마나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없고 경제부처를 장악해 정책을 일사분란하게 추진하는 경제사령탑은 권위주의정부 시절의 모델이라는 게 한부총리 시각이다. 참여정부의 정책 결정시스템이 모든 이해관계자들의 이해와 합의를 통해 결과를 도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합리적인 실무형 경제부총리가 맞다는 논리다.재경부 관계자는 “참여정부의 한부총리에게 과거의 경제부총리 모델을 요구해선 안된다”며 “정부가 바뀌고, 정책 결정시스템이 변화됐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새로운 경제정책 컨트롤타워의 위상을 정립해 가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런 시스템 변화의 단적인 예로 부동산 종합대책의 수립과정을 예로 들었다.“과거 같으면 재경부가 건설교통부 금융감독위원회, 국세청 등 관계부처 실무자들을 모아 밀실에서 대책을 마련한 뒤 대통령 재가를 받고 언론에 발표해 강력히 추진하는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총리 주재로 당ㆍ정이 매주일 만나 사안별로 머리를 맞대 논의한 뒤 그때그때 언론에 발표하고 여론을 수렴한다. 부동산정책은 특히 입법사항이 많아 여당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언론 발표 창구는 당으로 일원화했다. 그러다 보니 최대 경제 현안인 부동산정책 결정에서 경제부총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실질적으로는 경제부총리가 부동산정책 수립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모양새가 바뀌었을 뿐이지 ‘경제정책 컨트롤타워에는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어쨌든 경제부총리는 결국 경제성적표로 평가받는다. 경제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잘했느냐, 못했느냐보다도 경제를 살렸느냐, 못 살려느냐가 더 중요한 평가잣대다. 시대가 변하고 정책결정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도 경제부총리의 성공 여부는 경제를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었느냐에 달렸다.그런 점에서 지난 3월 취임해 5개월을 넘긴 한부총리의 경제성적표는 그리 높지 않다. 분기별 경제성장률은 지난 1/4분기 2.7%에 이어 2/4분기 3.3%로 여전히 잠재성장률(5% 수준)을 크게 밑돈다. 경기회생의 관건인 내수회복 전망도 밝지 않은 상태다.한부총리가 경제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한 평가를 떠나 가장 아쉬운 대목이 바로 그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