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일본)공장ㆍ설비의 해외이전 계획이 없다.’<한경비즈니스>와 일본의 경제격주간지<자이카이(財界)>가 공동기획ㆍ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기업의 임직원 10명 중 9명은 공장ㆍ설비의 해외이전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잃어버린 10년’ 이후 최근까지 일본 재계의 화두였던 ‘제조업 공동화’가 드디어 막을 내린 셈이다. 되레 일각에선 일본 국내로의 제조업 U턴 현상까지 주목한다. 1990년대 이후의 고질적 복합불황을 경쟁력 회복의 기회로 삼은 결과라는 평가가 많다. 설문결과 해외이전 계획을 밝힌 기업인은 7.5%에 불과했다. ‘이전계획이 없다’(85%)거나 ‘검토 중’(5%)이라고 밝힌 부정적 의견이 90%에 달했다.이번 설문조사는 오랜 준비기간을 거쳤다. 기획단계까지 포함시키면 1년여에 걸쳐 작업을 진행했다. 이 와중에 역사인식ㆍ독도문제로 한ㆍ일 양국의 국민감정이 악화되는 등 조사결과에 악영향을 미칠 만한 돌발변수를 만나기도 했다. 설문지는 <한경비즈니스>가 작성했으며, 응답자 선정과 배포ㆍ수거는 <자이카이>가 맡았다. 조사대상은 KDDIㆍ미쓰이화학ㆍ구보타ㆍ일본맥도널드 등 일본의 대기업ㆍ중견기업 약 100개사 임직원에 한정했다. 총 100장이 뿌려졌고, 42장(2장은 판독불능으로 제외)이 수거됐다. 조사는 지난 2월 말부터 3월 초에 걸쳐 일본 현지에서 진행됐다.비록 소수지만 공장ㆍ설비를 해외에 이전할 경우 해당 지역으로는 동남아가 유력한 후보국가로 꼽혔다. 12.5%가 아세안(ASEAN)을 1순위에 올렸다. 베트남ㆍ말레이시아ㆍ태국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의 공장’ 중국도 여전히 생산기지로서 건재한 모습이다. 7.5%의 응답자가 중국을 해외이전 후보지로 골랐다. 반면 60~80년대 고도경제 성장기 때 인기 투자국으로 자리매김한 한국은 이번 조사에서 ‘0%’로 나타났다. 한국은 단 한 명의 응답자도 투자 대상국으로 고려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는 90년대 이후 간간이 목격된 일본기업의 탈(脫)한국 붐과 일맥상통하는 결과다.일본기업이 한국투자를 꺼리는 데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이는 ‘한국기업의 시급한 해결과제’ 질문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응답자들은 노사관계를 최대 난관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32.5%가 한국기업의 노사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전했다. 25%는 불안한 정치구조가 한국기업의 앞날을 막고 있다고 봤다. 10%로 집계된 정부규제도 서둘러 해결해야 할 미션에 포함됐다.한ㆍ일 FTA(Free Trade Areaㆍ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이었다. ‘양국 모두 이익이 될 것’으로 내다본 응답자가 57.5%에 달했다. 체결만 되면 ‘한ㆍ일 FTA = 윈윈게임’이란 얘기다. 결국 일본의 경제인들은 FTA 찬성 쪽에 무게중심을 싣는 분위기다. 현재 한ㆍ일 FTA 협상은 농업부문 등 몇몇의 갈등 이슈 탓에 체결에 난항을 겪고 있는 상태다. 한편 한ㆍ일 FTA가 일본보다 한국에 도움이 될 것으로 답한 응답자도 적잖았다. 5명 중 1명(17.5%)이 한국 국익에 유리하다고 답했다. 일본 국익(2.5%)이 더 향상될 것이란 응답자는 일부에 그쳤다.한국기업과의 협력의향을 물었다. 전체 응답자의 절반인 50%가 ‘한국기업과 협력ㆍ파트너십 관계를 맺을 의향이 있다’고 전했다. 32.5%는 ‘협력의향이 없다’고 응답했다. 그렇다면 일본 기업인들이 협력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산업부문은 뭘까. 응답자의 25%는 ‘서비스부문’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여기서 중요한 힌트가 목격된다. 공장ㆍ설비의 한국투자 의향은 전혀 없지만 서비스부문만은 제휴를 원했다. 결국 한국을 생산기지보다 소비시장으로 해석하려는 의향이 강한 셈. 여기서 서비스부문의 협력ㆍ제휴는 한국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열쇠로 제격이다. 전기전자를 비롯한 IT부문도 일본 기업가들에게는 관심 있는 분야다. 17.5%가 제휴관계를 맺는다면 IT분야에 흥미가 있다고 답했다. 반도체ㆍ기계ㆍ철강 등은 소수의견에 그쳤다.이들은 한국의 투자환경에 대해선 그다지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32.5%가 한국의 투자환경이 ‘조금 나쁘다’며 불합격 점수를 줬다. ‘아주 나쁘다’는 사람도 2.5%로 집계됐다. 27.5%는 ‘보통’이라고 답했다. 결국 이 수치를 모두 합한 62.5%가 ‘한국 투자환경 = 보통 혹은 그 이하’라는 인색한 평가를 내렸다. 반면 ‘조금 좋다’고 말한 응답자는 25%에 불과했다. 긍정적인 답변인 25%를 뺀 상당수 응답자가 한국시장의 투자 메리트에 머리를 갸웃거렸다는 결론이다.투자환경이 나쁜 가장 큰 이유는 ‘불안하고 비타협적인 노사관계’가 꼽혔다. 응답자의 17.5%가 한국의 노사관계를 우려했다. 곽수일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외국기업 CEO들은 한국의 대립적인 노사관계와 이로 인한 기업가정신의 상실을 경기침체의 원인으로 생각한다”며 “상생보다는 대결지향적인 노사관계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불안정한 정치구조’도 외자 도입의 걸림돌로 빠지지 않았다. 12.5%의 응답자가 한국 특유의 후진적인 정치구조를 한계로 지적했다. 더불어 경직적인 정부규제도 5%로 집계됐다.한국의 투자환경이 그런대로 괜찮다고 답한 25%의 응답자 중 상당수는 ‘지리적 이점’을 그 이유로 기술했다. 25%의 응답자를 100%로 환산했을 때 17.5%가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메리트’를 우선순위에 올려놓았다. 시장접근비와 물류비 감소가 원가절감 및 부가가치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그렇다면 일본의 최고경영진이 생각하는 한국기업의 핵심 경쟁력은 뭘까. 응답자의 37.5%가 뛰어난 노동력을 한국기업의 최대 무기로 꼽았다. 이들은 높은 학구열과 우수한 인적자본이야말로 기업성장의 중대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데 동의했다. 인적자본과 관련, 한국 경영진의 경쟁력도 비교적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17.5%가 빼어난 경영진이 한국기업의 경쟁력이라고 답했다. 비슷한 의미로 R&D(연구개발) 파워도 한국기업의 재산으로 거론됐다. 15%의 응답자가 ‘블루오션’ 창조를 위한 R&D부문에 높은 점수를 줬다.응답자들은 자국(일본) 경제의 핵심 경쟁력 또한 ‘우수한 인적자본’이라고 답했다. 부존자원 등 마땅한 태생적 경쟁무기 없이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한ㆍ일 양국의 ‘인적자본’에 거는 기대감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R&D(40%)와 노동력(25%), 경영진(12.5%) 등 인적자원과 관련된 항목만 77.5%로 조사됐다. 응답자 10명 중 8명이 일본경제의 중추로 사람을 꼽았다는 결론이다. 여기에는 한때 붐이었던 ‘미국식 경영’의 도입에도 불구, ‘일본식 경영’으로 일컬어지는 종신고용ㆍ연공서열 등 ‘기업특수적 인적자본’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풍조도 기여한 것으로 분석된다.하지만 일본경제 역시 아직 갈길이 멀다. ‘잃어버린 10년’의 악령이 곳곳에 건재해 있어서다. 응답자들은 ‘일본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핵심과제’로 정부규제를 첫손가락에 꼽았다. 40%가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정부의 ‘보이는 손’을 없애줄 것을 요구했다. 고성장의 그늘인 토지ㆍ임금 등 고비용구조의 타파도 선순위 해결과제로 꼽혔다. 응답자의 20%가 비용구조에 난색을 표했다. 불안정한 정치구조(15%)와 금융시스템 불안(10%), 노사관계(5%) 등도 시급히 풀어야 할 고민거리로 정리됐다.향후를 책임질 성장엔진 마련은 한ㆍ일 모두 중차대한 과제다. 미래를 담당할 일본산업의 주력업종에 대해 물었더니 역시 50%의 응답자가 자동차부문을 가장 믿음직한 대표선수로 낙점했다. 이는 최근 사상 최대의 실적을 거둔 도요타자동차와 닛산, 혼다 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전기전자 등 IT부문도 45%의 동의를 얻으며 일본산업의 유력한 차기주자로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게 전기전자부문에서 ‘최첨단’으로 대변되는 ‘No.1’ 기술을 보유한 일본기업은 수두룩하다. 다만 반도체(2.5%)에 대한 믿음은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최근 2~3년 새 일본경제는 불황보다 회복이란 단어와 더 친했다. 일본정부가 공식적인 경기회복을 언급할 만큼 복합불황의 긴 터널에서 벗어났다는 분석도 힘을 얻는 추세다. 하지만 일본 기업가들은 여전히 배가 고픈 모양새다. 응답자의 65%가 ‘좀 회복했지만 아직 미진하다’며 본격적인 경기회복을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렸다. 17.5%는 ‘절반 정도 회복했다’며 약간의 자신감을 나타냈다. ‘미진하지만 꽤 회복했다’는 낙관적인 응답은 7.5%에 그쳤다. 반면 ‘그다지 회복하지 못했다’는 사람도 10%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한ㆍ중ㆍ일 3국의 기업경쟁력을 국제 비교해 봤다. 응답자들에게 5점 만점으로 한ㆍ중ㆍ일 3국의 기업경쟁력을 수치로 매겨달라고 요청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총점 기준 일본이 4.18점으로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3.11점의 한국이 올랐고, 중국은 2.17점으로 그 뒤를 이었다. 세부질문은 6개 부문으로 나눴다. 기술력, 노동생산성, 노사문화, 브랜드 가치, 경영기법, CEO 능력 등이다. 일본은 기술력에서 4.74점의 최고 점수를 얻었다. 반면 노동생산성은 3.26으로 6개 부문 중 가장 낮았다. 한국은 3.69점을 얻은 CEO 능력이 가장 월등했던 반면, 노사문화는 2.67점으로 최저 점수에 머물렀다. 역시 중국은 3.32점을 기록한 노동생산성이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는 일본(3.26점), 한국(3.07점)을 제친 결과다.주요산업(전자ㆍ자동차ㆍ기계ㆍ화학 등)의 기술격차를 연수로 질문한 결과도 비슷했다. 응답자들은 ‘중국→한국→일본’의 순서로 적잖은 기술격차가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현재 기준 ‘중국→한국’의 시차는 5.37년이고, ‘한국→일본’의 격차도 6.24년으로 널찍이 벌어졌다고 답했다. 결국 응답자들은 ‘기술 선도국’ 일본과 ‘기술 따라잡기’(Catch-Up)에 사활을 건 중국간에는 모두 11.61년의 격차가 있다고 봤다. 앞으로는 어떨까. 평가시점을 향후 10년 후로 설정한 뒤 동일하게 물었다. 결과는 의외였다. 되레 지금보다 기술격차가 더 벌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한국→일본’엔 각각 4.83년, 8.17년의 시차가 예상됐다. 도합 13년이다. 재미있는 건 ‘중국→한국’ 시차는 줄어든 반면, ‘한국→일본’ 격차는 더 벌어진다는 계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