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목 국민소득(GNI) 기준으로 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11위 수준이다. 한국은행이 세계은행의 ‘세계개발지수 2005’ 보고서를 정리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경제규모를 나타내는 명목 GNI가 2003년 현재 한국은 5,764억달러로 전년(5,430억달러)보다 소폭 늘었으나 세계 순위는 변동이 없었다. 경제대국으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수치다.특히 한국경제의 역사가 일천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세계 11위는 놀라울 따름이다. 한국경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길게 잡아봐야 광복 이후다. 결과적으로 불과 60년 만에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다.한국경제 성장의 원동력은 단연 기업이다. 지난 60년간 국내기업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기업들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섰지만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특히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부터는 한국경제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기대 이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한강의 기적’ 역시 기업이 만든 성과물 가운데 하나다. 한국기업의 성장사를 혼란기(1945~1954년), 형성기(1955~1970년), 성장기(1971~1987년), 전환기(1988~1997년), 재도약기(1998년 이후)로 나눠 살펴본다.혼란기(1945~1954년)별 다른 준비 없이 해방을 맞은 한국경제는 우왕좌왕 그 자체였다. 식민지배 청산과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도입이라는 과제를 안고 출발했지만 정치 및 사회 불안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이어졌다. 특히 한국전쟁은 한국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고, 한국경제를 수십년은 후퇴시켰다. 당시 경제적 피해는 68억4,000만달러로 53년 한국 연간 GNP 40억8,000만달러의 1.7배에 달하는 규모였다.공업생산의 위축 역시 극에 달했다. 방직공업 생산액의 경우 1939년(17만985원)과 비교해볼 때 1946년(6만7,855원)에는 무려 60.31%나 줄었다. 구체적으로는 식료품공업(82.93%), 화학공업(-65.54%), 제재 및 목재공업(-19.89%) 등이 모조리 큰 폭의 하락세를 보였다. 소비재 중심의 해외원조가 한국경제를 지탱해줬을 뿐이다.다만 기업 입장에서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가 수입 대체산업을 본격 육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관세 등 국내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정책도 나왔다. 이에 따라 ‘삼백(三白)산업’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 관련산업과 기업이 자리를 잡아가는 수확도 거뒀다. 당시 삼백산업은 면방직, 제분, 제당을 일컬었다.형성기(1955~1970년)5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국경제는 다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전후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반을 형성해 갔던 것이다. 전근대적 후진국에서 탈피해 본격적인 경제성장의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특히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립경제의 기반을 닦는 데 큰 도움이 됐다.기업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55년 8,600여개에 불과하던 기업수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갔다. 다만 핵심산업은 여전히 앞서 말한 삼백산업이었다. 50년대 재계 1위로 군림했던 삼양사 역시 삼백산업의 대표적 기업 가운데 하나였다.경제개발시대에 걸맞게 건설사들이 대거 등장했다. 지금도 건설업계에서 크게 활약하는 현대건설과 대림산업 등이 당시 이름을 날린 대표적 건설사였다. 이와 함께 무역업체들도 우후죽순 등장하기 시작해 주로 생활필수품 수입을 통해 회사 규모를 키워나갔다.60년대 이후에는 수출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부정책이 수출중심으로 바뀌면서 관련업체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때 수출산업을 주도한 대표적인 업종으로는 섬유, 신발, 목재 등을 꼽을 수 있다. 70년에는 이들 산업이 전체 수출의 6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성장기(1971~1987년)1ㆍ2차 경제개발 5개년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크게 안정을 찾아갔다. 이에 자신감을 갖게 된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년)을 내놓으면서 정부의 시장개입을 줄이고 시장경제 제도를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할 수 있도록 기업육성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일각에서는 특혜시비가 일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정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단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안정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당시 정부의 기본목표는 수출의 획기적 증대, 중화학공업의 건설로 요약된다. 자본 및 기술집약적인 산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73년에 불어닥친 제1차 오일쇼크는 경제에 큰 불안감을 안겨주며 산업 전 분야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줬다.80년대 들어 경제정책은 고도성장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국민생활 안정에 중점을 두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아울러 수출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통한 국제수지 개선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정부는 에너지절약형 산업과 부품산업 등 비교우위가 있는 산업구조로 전환하는 정책을 구사했다.대기업집단 주도의 성장도 본격화됐다. 흔히 말하는 재벌들이 산업 각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상위 6대 기업(현대, 삼성, 럭키금성, 대우, 선경, 쌍용) 연매출액을 보면 73년 4,000억원에서 80년에는 14조7,000억원으로 크게 증가했다. 계열사 수 역시 같은 기간에 116개에서 308개로 급증했다.여러가지 변수가 기업들을 압박했지만 오일쇼크 등을 겪으며 기업 체질이 크게 강화된 것은 뜻밖의 소득이었다. 또한 중동특수를 등에 업은 건설사들의 약진이 눈부셨다.전환기(1988~1997년)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사회적으로 국민들의 욕구가 일시에 분출됐다. 정부의 경제정책 역시 양적 성장주의에서 질적 성장위주로 방향을 바꿨다. 정부는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늘렸고, 정보화 역시 정부의 경제정책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개방과 국제화 또한 빼놓을 수 없다.경제운영 형태 역시 질적 변화를 겪는다. 정부의 지시와 통제 위주에서 정부와 민간이 모두 참여하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무역수지 적자폭이 크게 확대되면서 총외채가 엄청나게 불어났고, 이는 97년 IMF 외환위기를 초래하는 단초를 제공했다.기업들 역시 많은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노동운동이 크게 활성화되면서 비용이 크게 늘었고, 시장이 급속도로 개방되면서 본격적인 글로벌 경쟁체제를 갖추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다. 92년 외국인투자가들의 직접적인 주식시장 참여가 허용되면서 달러뭉치가 국내시장에 밀려든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다.부정적인 것으로는 기업들이 그동안 외형성장에 치중한 결과 30대 그룹 부채비율이 1996년 기준으로 388%에 이르렀다는 것. 결과적으로 기업경쟁력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일부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나섰지만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고, 97년을 전후해 재벌그룹 상당수가 부도를 맞는 아픔을 맛봤다.재도약기(1998년 이후)경제가 IMF 관리체제로 바뀌면서 기업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인원을 정리하고 사업규모를 축소했으며 필요하다면 우량 계열사도 매각하는 등 살아남기에 온힘을 기울였다.첨단산업과 지식기반 산업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떠오른 점도 눈에 띈다. 기업들은 앞다퉈 이들 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벤처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준비가 부족했던 일부 기업들은 이 과정에서 적잖은 손해를 입기도 했지만 IT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우뚝 섰다. 2004년 기준으로 IT산업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1%를 기록하기도 했다.요즘 국내 대기업들은 단순히 성장위주의 전략을 버리고 윤리경영과 사회공헌분야에 남다른 힘을 쏟고 있다. 투명한 기업을 만들고 기업이 벌어들인 수입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취지에서다.※ 참고자료: <한국경제의 이해>(주성환 외 2인 지음/무역경영사), <한국기업 성장 50년 재조명>(김종년 외 3인 지음/삼성경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