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코아에 이어 해태유통까지 인수한 이랜드그룹이 유통업계 신흥강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우선 몸집이 엄청 불었다. 미들급 수준에서 헤비급으로 업그레이드됐다. 해태유통을 합치면 유통업 매출이 1조4,000억원(2004년 기준)에 이른다. 신세계, 롯데, 현대백화점 등 이른바 ‘빅3’를 지근거리에서 위협하는 자리까지 치고 올랐다. 이랜드가 인수하는 업체마다 대박을 터뜨린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회생이 불가능해 보이던 뉴코아를 인수해 프리미엄 아웃렛으로 컨셉을 바꾸더니 매출이 평균 100% 이상 늘어나는 만루 홈런을 날렸다.이번에 32개 슈퍼마켓을 가진 해태유통 인수에 유통업계가 예의주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GS리테일과 롯데가 경쟁하고 있는 슈퍼마켓시장에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는 시각이 적잖다. 더군다나 이랜드의 공격경영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도 끊임없이 M&A시장을 노크하고 있기 때문이다.박성수 회장이 이화여대 앞에 ‘잉글런드’라는 이름의 작은 옷가게를 오픈한 것이 지난 80년. 그 조그마한 옷가게가 93년에는 매장수 2,000개, 매출액 5,000억원 규모로 성장하며 패션업계에 돌풍을 몰고 왔다. 외환위기를 전후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그것은 더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한 2보 후퇴였을 뿐이다. 2004년 그룹 매출액이 2조원을 넘어섰고, 순이익은 2,854억원에 달했다. 오는 2007년에는 매출액 5조3,000억원, 영업이익 7,500억원을 달성해 세계 100대 브랜드에 진입하겠다는 야심찬 비전을 세워놓고 있다. 유통업계 다크호스로 ‘빅3’를 위협하고 있는 ‘이랜드식 경영’의 실체는 뭘까.이랜드가 최근 해태유통 인수에 들인 비용은 636억5,000만원. 2003년 뉴코아를 집어삼키는 데는 8,353억원이라는 거액을 쏟아부었다. 이뿐만 아니다. 2002년 국제상사 지분 51%를 사들이면서 투입한 비용도 550억원이다. 현재 세이브존 사냥에도 적극 나서고 있으며, 8월에는 1,300억원을 들여 그랜드백화점 서울 강서점과 주차장 부지를 확보하는 내용의 본계약을 체결한다. 패션분야에서도 2003년 여성복 브랜드 ‘데코’를 품 안으로 끌어들인 데 이어 ‘갭스’, ‘뉴골든’, ‘앙떼떼’, ‘베이비루니톤’ 등 의류브랜드들을 거침없이 낚아 챘다.이외에도 좋은 물건만 나타나면 언제든지 인수전에 뛰어들 것이라고 당당히 밝힌다. 사정이 이쯤 되자 업계에서는 이랜드의 자금력에 대한 설왕설래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연이은 M&A로 재무구조가 취약해졌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때마침 최근 한국기업평가가 이랜드 회사채 신용등급 전망을 기존 ‘안정적’에서 ‘유동적’으로 변경했다. 한기평은 “그룹 차원의 공격적 인수합병으로 재무적 부담이 확대됐다”고 변경이유를 설명했다.하지만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 이랜드 관계자의 주장이다. 필요한 자금조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이랜드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먼저 그룹의 이익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2002년부터 3년 연속 1,000억원 이상 순이익을 낼 정도로 경영실적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2,854억원의 순이익을 올려 3,000억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자산유동화에 성공한 것도 자금마련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이천일아울렛은 2003년 ABS(자산유동화증권)를 발행해 1,500억원을 마련했다. 뉴코아는 점포를 매각한 직후 곧장 재임대해 운영하는 세일앤리스백(Sale&Lease Back)방식으로 5,000여억원의 자금을 끌어들였다. 최근 뉴코아아울렛 일산점, 평촌점, 인천점, 야탑점 등 4개점을 리뉴얼한 뒤 2,770억원을 받고 코람코에 일괄 매각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하반기에는 일산점, 평촌점 등 뉴코아아울렛 3개점도 회생시킨 뒤 2,200억원에 팔았다. 해외투자가들이 이랜드를 선호한다는 점도 자금력 걱정을 덜게 한다. 싱가포르투자청은 2004년 3월 5,000억원을 투자했다. 지금도 투자희망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의 귀띔이다.자금력뿐만 아니다. 이랜드 특유의 경영시스템이야말로 ‘이랜드 파워’의 원동력이라는 분석도 힘을 얻고 있다. 그룹의 경영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것은 ‘BUCO 시스템’이다.‘BUCO’는 ‘BU’(Business Unitㆍ회사를 경영하는 CEO)와 CO(Chief Officerㆍ회사의 전문가집단으로 BU장을 지원)의 합성어다. 그룹에 소속된 CO는 14명이다. 웬만한 기업은 CFO(최고재무책임자), CIO(최고정보책임자), CTO(최고기술책임자) 등을 두고 있지만, 이랜드처럼 CHO(최고인사교육책임자), CQO(최고 품질 및 서비스개선책임자), CLO(최고물류책임자)까지 임명한 기업은 드물다. 이들과 함께 CAO(총무), CCO(홍보), CDO(디자인), CHO(인력), CKO(지식경영), CMO(마케팅), CPO(생산), CRO(감사), CSO(전략기획), CTO(세무ㆍ회계), CWO(인터넷) 등을 두고 있다.이들은 박성수 회장을 독대할 수 있고, 박회장도 이들을 수시로 불러 의견을 구한다. 이랜드가 CO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그룹 8개 계열사의 CEO들이 그룹 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경영상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예를 들어 CDO를 맡고 있는 강미경 이사는 이랜드그룹 디자인부문 약 400명의 디자이너를 육성하고 재배치하며 평가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CKO인 장광규 전무는 그룹의 지식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CO로 전 계열사의 지식경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평가하는 일이 주 업무다.이랜드측에서는 14명 CO들의 공개를 꺼리고 있지만 이들은 대다수 이랜드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핵심인재로 영입된 사람들도 일단 영업현장에서 분위기를 익힌 뒤 자기 분야에서 일할 수가 있다.위탁경영도 이랜드 특유의 경영시스템이다. 뉴코아아울렛 8곳 중 7곳이 빌딩을 매각한 뒤 재임대해 위탁경영을 하는 방식이다. 그랜드백화점 강서점도 투자펀드를 끌어들여 인수한 뒤 이랜드가 위탁경영을 하게 된다.이랜드가 뉴코아를 인수할 때만 해도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렸다. 하지만 뉴코아가 알짜배기 점포로 되살아나면서 이런 염려는 순식간에 쏙 들어갔다. 뉴코아아울렛의 주요 점포인 일산, 인천, 동수원, 평택, 평촌, 야탑, 강남 등의 지난 1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평균 101% 늘어났다.이랜드가 짧은 기간에 이 정도의 성과를 낸 것은 이랜드 특유의 사업방식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이랜드는 창립 초부터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일종의 블루오션 전략이었다. 80년 초부터 이미 생산은 아웃소싱으로 돌리고 본사는 기획과 머천다이징, 디자인 기능만 유지했다.프랜차이즈를 도입한 것도 의류업계 최초다. 작은 옷가게가 13년 만에 매장수 2,000개를 돌파한 것은 프랜차이즈 시스템의 가공할 만한 파워 때문이다. 중저가 캐주얼 시장이라는 틈새를 개척한 것도 이랜드식 경영노하우다. 94년에는 국내 최초로 백화점식 할인점이라는 새로운 유통 형태인 ‘이천일아울렛’ 사업을 시작했다.이천일아울렛은 초기에는 유통업계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가 외환위기 이후 흑자로 돌아서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뉴코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일반 백화점 컨셉을 ‘백화점식 프리미엄 아웃렛’으로 변화를 준 것이 대성공을 거뒀다. ‘백화점식 프리미엄 아웃렛’이란 서비스와 상품의 질은 백화점 수준을 유지하되 20~50%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한다는 것이다.아울러 ‘리뉴얼 오픈 전략’도 주효했다. 이천일아울렛도 마찬가지지만 뉴코아도 일단 리뉴얼을 한 뒤 영업을 시작했다. 전체 8개 아웃렛 매장은 모두 새 단장을 마친 뒤에야 문을 열었다. 리뉴얼을 거친 매장은 모두 매출이 껑충 뛰었다. 아웃렛으로 변신한 첫 번째 매장인 일산점의 경우 지난해 하반기 매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250% 늘어난 것이 대표적이다.이랜드는 향후 수익성 위주로 유통업을 성장시켜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에서는 앞으로 5년 내에 대형 점포수를 지금의 2배인 40여개로 늘릴 계획이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M&A에도 적극 나선다는 방침이다. 이랜드 관계자는 “인수 후 1년 이내에 성공할 수 있는 기업만 인수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며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개 정도의 인수 제의가 들어오고 있지만 엄정한 선별을 거치게 되므로 실제로 1년에 한두 개 정도만 M&A를 할 수 있다”고 전했다.하지만 이랜드처럼 급성장하는 기업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노출하며 어려움을 겪는다. 우선 기업의 덩치가 갑자기 커지면서 그에 걸맞은 기업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이질적인 기업문화가 뒤섞이면서 정체성이 흔들릴 우려도 있다. 더군다나 일각에서는 8개의 계열사 중 상장사가 하나도 없다는 점을 들며 지나치게 폐쇄적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아직 20여명에 달하는 임원들의 프로필이 공개된 적이 없다는 점도 매출 3조원을 바라보는 기업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꼬집는다. 이랜드가 이제까지 ‘빠름의 철학’에서 성장의 금맥을 찾았다면 앞으로는 ‘느림의 철학’으로 규모에 걸맞은 초일류 조직문화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업계 관계자의 조언에 귀가 솔깃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