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마치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듯 세계 자동차업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쟁 자동차를 추월하고 있다. ‘싸구려 차의 대명사’라며 손가락질하던 글로벌 자동차업체들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아예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세계 유수의 언론들도 현대차의 눈부신 성장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타임>은 “1999년 이후 세계 주요 자동차업체 중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룬 기업”(4월24일자)이라고 칭찬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비약적인 품질혁신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 자동차회사로의 성장이 가능할 것”(아시아판 4월29일자)이라며 현대차의 미래를 밝게 내다봤다.현대차의 돌풍은 지난해와 올 1분기에 거둔 뛰어난 경영실적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지난해 극심한 내수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수출에서 크게 성공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국내에서 55만1,000대를, 해외에서 154만7,000대를 팔아 32조4,000억원의 매출을 올린 것.특히 지난해는 현대차가 에콰도르에 포니 6대를 첫 수출한 지 28년 만에 1,000만대 돌파의 위업을 이루기도 했다. 그것도 전적으로 국내생산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해외 현지공장에서의 생산물량이 연 44만8,184대(2003년 대비 85.4% 증가)에 이를 정도로 글로벌화됐다. 더군다나 자동차의 본고장인 미국을 비롯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중국, 인도 등에서 거둔 성적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해외진출 현황을 국가별로 보면, 도요타, 벤츠, BMW 등 유명 자동차업체들이 총출동한 미국시장에서 뉴 EF쏘나타와 싼타페 판매가 전년 대비 각각 30.2%, 10% 늘어나며 시장점유율 2.5%를 거뜬히 넘어섰다. 현대차의 중국법인 베이징현대기차는 14만4,000대를 팔아 출범 2년 만에 연 10만대 판매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우며 콧노래를 불렀다. 올 들어서도 현대차의 무서운 상승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1분기에만 28만1,699대를 수출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9.8% 늘어난 것이다. 미국에서는 쏘나타ㆍ그랜저XGㆍ투싼 등 고부가가치 차량이 인기를 끌며 10만대(2004년 1분기 대비 13.3% 증가)를 판매했다. 중국에서는 5만6,064대를 팔아 시장점유율 9.8%로 중국에 진출한 해외업체 가운데 당당히 1위를 기록했다. 인도에서도 판매량 6만대로 전년 동기 대비 16.8% 성장하며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갔다.매출 4% R&D투자현대차가 해외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정몽구 회장이 뚝심 있게 추진했던 ‘품질경영’이 서서히 빛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회장은 99년 현대차와 기아자동차의 통합 이후 매년 매출액의 4% 이상을 R&D에 쏟아부을 정도로 품질개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2002년 하반기 미국 JD파워의 초기품질지수에서 쏘나타와 싼타페가 도요타 등 세계 유수 자동차를 제치고 2위와 3위에 올라서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정회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신차가 개발 완료되기 전 설계 품질을 철저히 검증함으로써 차량품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킬 것을 기술진에 지시했다. 그 결과 미국 <컨슈머리포트>가 쏘나타, 싼타페, 그랜저XG 등을 2003년 추천차종으로 지목했고, 쏘나타는 2003년에 이어 2004년에도 JD파워의 초기품질조사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현대차는 그동안 세계 최고의 품질력을 보유한 도요타와의 신차품질 격차를 줄여 2007년까지는 동등한 위치까지 가겠다는 전략이었다.하지만 예상보다 3년이나 빨리 ‘도요타’라는 벽을 넘어선 셈이다.JD파워에 따르면 현대차는 2000년 203점에서 지난해 102점으로 4년 만에 50%를 넘어서는 품질향상 평가를 받은 반면, 같은 기간 업계 평균치는 154점에서 119점으로 23% 향상되는 데 그쳤다. 현대차가 신차품질에서 도요타, BMW 등 유명 브랜드를 앞섬에 따라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물론이다.현대차는 올해를 ‘글로벌 경영의 원년’으로 삼았다. 실질적인 글로벌 경영체제를 구축하고,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의도다. 우선 침체에 빠진 내수경기를 살리기 위해 연내에 친환경 디젤승용차 등 6~7종의 신차를 출시한다. 이외에도 그랜저TG, 쏘나타 등 전략차종에 마케팅 역량을 집중하고 고객중심의 CRM 활동을 강화하는 등 다양한 판매전략으로 불황을 돌파하겠다는 것이다.해외시장에서도 미국시장을 중심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구사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특히 올 6월 준공한 앨라배마 공장에 거는 기대는 무척 크다. 앨라배마 공장은 자동차 제작, 조립의 전 과정과 각종 차량 테스트를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종합자동차 생산공장. 올해는 쏘나타 9만대를 생산하고, 이를 2007년까지 30만대 규모로 늘릴 방침이다. 글로벌 경영의 요충지인 중국공략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이미 지난해 15만대 규모의 라인증설을 완료한 데 이어 2007년까지 60만대 생산체제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현대차의 해외공장은 철저한 현지화 전략과 지속적인 품질 제고를 통해 2010년까지 200만대 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대차는 2010년까지 상품경쟁력 강화, 현지화 전략, 브랜드 가치 향상, 환경경영체제 구축, 글로벌 경영혁신 등 5가지 중장기전략을 추진, 글로벌 톱메이커로 발돋움한다는 야심찬 비전을 발표했다. 하지만 세계시장을 내 집처럼 누비는 현대차지만 우려되는 점도 만만찮다. 자동차 내수시장이 부진한데다 세계시장에서도 강력한 견제에 들어갔다. 단골로 터지는 노사분규도 골칫거리다. 뚝심의 현대차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향후에도 온갖 난관을 뚫고 ‘세계 빅5’에 올라설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돋보기 정몽구 회장 리더십보스형에서 전략가형으로 변신현대자동차 임직원들은 정몽구 회장(67)을 ‘보스형 오너’로 불렀다. 임직원에 대한 장악력과 업무추진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년 전 미국에서 시작한 ‘10년, 10만마일 무상보증수리’의 경우 내부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기어코 밀어붙인 끝에 오늘날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회장은 강한 돌파력과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외환위기 직후 적자였던 현대차를 맡은 지 1년 만에 4,000억원대 흑자로 탈바꿈시켰고 해마다 기록을 경신해왔다.하지만 최근에는 정회장에 대한 평가가 예전에 비해 달라지고 있다. 그룹 안팎에서 ‘전략가형 CEO’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단순히 밀어붙이는 데서 벗어나 장기 비전을 세우고 향후 이슈를 예측해 이를 곧장 실행하는 스타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해외시장 전략을 놓고 그룹 안에서 논쟁이 붙었는데, 가장 유력한 안 중의 하나가 ‘렉서스’ 같은 고급브랜드를 만들어 회사 이미지를 한 단계 상승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회장은 “품질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하는 것은 되레 이미지가 실추될 수 있다”며 반대해 우선 품질향상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임직원들은 이후 해외 유력언론이나 조사기관으로부터 현대차의 품질지수가 향상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정회장의 예지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정회장이 품질경영에 목숨을 걸었다”고 현대차 관계자들이 귀띔할 정도로 ‘품질경영’은 정회장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정회장은 99년 초 서울 여의도 기아차 사옥에 ‘품질회의실’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당시 계동 사옥에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인데, 기아차 경영진은 지하 일식집 등 임대점포를 내보내고 100여평 공간을 확보했다. 정회장은 이곳에서 현대ㆍ기아차와 선진업체의 경쟁차종을 비교 전시하면서 품질과 기능의 문제점들을 직접 체크했다. 2000년 양재동으로 사옥을 옮긴 뒤에는 1층에 품질확보실을 마련해 품질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것은 물론 이와는 별도로 1층에 품질상황실을 설치했다. 2002년 8월에는 기아차 오피러스 수출차량을 손수 시험주행하다가 전문가도 찾기 힘든 미세한 소음을 발견해 선적을 40여일 미루며 저소음 엔진으로 바꿀 것을 지시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품질경영’과 함께 ‘현장경영’도 정회장이 중시하는 경영철학 중 하나다. 현장에서 보고 배우고 현장에서 느끼고 현장에서 해결한 뒤 확인까지 한다는 ‘삼현주의’(三現主義)가 그것이다. 정회장의 좌우명은 ‘일근천하무난사’(一根天下無難事)로 ‘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현장을 누빈 현장경영 습관 덕분에 기아차 인수와 해외진출 등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것이 현대차측의 설명이다. ‘품질’과 ‘현장’은 보스형에서 전략가형으로 변한 정회장의 주력화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