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은 없었다. 1위는 역시 삼성전자였다. 매출액, 당기순이익, 시가총액 등 주요 재무제표에서 2위를 압도적인 차이로 따돌렸다. 매출은 57조6,324억원, 영업이익 12조169억원, 당기순이익 10조7,867억원을 기록했다. 모두 한국 기업 역사상 최대의 실적이다.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엄청나다. 삼성전자의 매출은 국내총생산(GDP)의 7.4%에 해당하고 수출은 16.4%, 시가총액은 무려 17.7%에 달한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실적은 국내용이 절대 아니다. 세계적으로 봐도 최고 수준에 해당한다. 특히 당기순이익 10조원을 내는 기업은 세계적으로도 열손가락을 채우지 못한다. ‘글로벌 삼성’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사상 초유의 기록에 대해 이 회사 IR팀의 주우식 전무는 “지난해 원화가치 상승, 고유가, 원자재난, 중국의 긴축정책 등 위협요소들이 많았지만 차별화된 원가경쟁력과 제품력을 바탕으로 순이익 100억달러를 돌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열악한 시장환경도 삼성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던 셈이다.5개 사업부 가운데 삼성전자를 이끄는 쌍두마차라 할 수 있는 반도체와 정보통신사업부가 고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특히 메모리반도체시장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반도체사업부의 활약이 빛났다. 매출이 18조2,248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무려 43%나 증가했고 7조4,750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영업이익률이다. 41.1%라는 경이적인 영업이익률을 기록해 삼성이 자랑하는 원가경쟁력과 고부가가치 전략의 위력을 보여줬다.휴대전화를 판매하는 정보통신사업부의 성적도 이에 못지않다. 모두 8,653만대를 판매, 2003년보다 55%나 성장해 역대 최고 증가율을 보였다. 이에 따라 매출은 33% 불어나 18조9,359억원에 달했고 영업이익은 2조8,111억원을 기록했다. 올림픽 마케팅이 주효한데다 북미와 BRICs(브릭스) 등 주요국에서 선전한 것이 성장을 주도했다. 실제 삼성전자 휴대전화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2003년 10.8%에서 2004년 13.7%로 뛰어올랐다. 올 1분기에는 점유율이 더욱 높아졌다. 14.1%로 16.5%인 2위 모토롤러를 턱밑까지 추격해 들어간 상태다.삼성전자의 ‘떠오르는 희망’인 LCD사업부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아직까지 매출액은 반도체나 정보통신에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성장속도만은 두 사업부를 앞지르고 있다. 지난해 매출이 8조6,887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67%나 불어났고 영업이익은 1조8,845억원으로 무려 111%나 급성장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누적생산 1억대를 돌파, 세계 LCD산업의 기념비적 기록을 작성했다.삼성전자의 급성장은 국내는 물론 세계 기업계의 화제다. 99년 이전만 해도 삼성이 이렇게 빠르게 세계경제의 심장부로 진격해 들어올지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99년 이전 삼성전자의 실적은 현재와 비교할 때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69년 설립됐지만 99~2004년까지 매출이 누적매출의 65.6%를 차지한다. 순이익은 88.1%에 달한다. 35년의 역사를 통해 달성한 실적 대부분이 최근 5~6년 사이에 발생한 것이다.기업가치도 숨가쁘게 상승하고 있다. 브랜드 조사기관인 인터브랜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지난해 브랜드 가치는 125억5,000만달러로 세계 21위였다. 2000년 43위에서 4년 만에 22계단이나 뛰어오른 것이다. 99년에는 아예 등수에도 들지 못했다. 삼성전자의 위상변화는 <포춘>과 <파이낸셜타임스>의 기업순위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포춘>이 선정하는 ‘글로벌 기업 500위’ 순위에서 2001년 92위에서 지난해 54위로 점프했고, <파이낸셜타임스>의 ‘글로벌 기업 500위’에서는 같은 기간 225위에서 45위로 약진했다.이 회사가 단기간에 면모를 일신할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시대를 일찌감치 예견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세계적인 IT시장조사업체인 가트너사의 폴 도노반 선임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는 디지털시대를 명확히 예견하고 있었다”며 “이 회사는 이미 5년 전부터 사고의 정점을 이끌고 있다”고 극찬했다. ‘소니 등 기존의 가전시장 강자를 모방하던 수준에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하고 수익성 높은 가전기업으로 발돋움했다’는 <비즈니스위크>의 평가도 같은 맥락이다.‘사고의 정점’을 이끄는 요인은 역시 ‘우수한 인재’와 연구개발(R&D)에 대한 과감한 투자다. 삼성의 전직원 6만2,000명 가운데 R&D인력이 2만4,000명에 이른다. 생산직 직원 2만명을 제외하면 연구인력이 전체의 절반을 넘는다. 99년부터 별도의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미국, 일본, 인도, 중국 등 인재풀이 풍부한 국가를 대상으로 고급인재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다. 지난 3년간 R&D 투자비는 10조원에 이른다. 올해는 매출목표의 9.2%에 해당하는 5조4,000억원을 투자할 방침이다.글로벌 초일류 향해 ‘진군’자타가 공인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입지를 굳혔지만 삼성은 방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성장의 고삐를 잡아당기고 있다. 삼성이 급성장하는 데 배경이 된 디지털시대의 특성이 오히려 삼성에 덫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윤종용 부회장은 “아날로그시대에는 후발업체가 선발업체를 따라잡기 어려웠다. 하지만 디지털시대에는 단 2개월만 늦어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따라서 스피드와 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한 번 승자가 영원한 승자가 될 수 없는 상황이다”고 말한다. 결국 끊임없는 혁신과 투자만이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의미다.삼성전자는 최근에도 여러 번 ‘혁신경영’을 발표하는 등 혁신의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있다. ‘특허경영’과 ‘디자인경영’이 대표적이다. 특허와 디자인경쟁력을 갖추지 않고는 생존이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사실 특허와 디자인부문에서 삼성의 경쟁력은 이미 세계적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는 게 삼성의 현실인식이다.삼성의 특허경쟁력은 미국 특허청이 발표한 기업별 특허 보유 통계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2004년 기준 1,604개의 미국특허를 보유하고 있어 전체 순위 6위에 올랐다. 인텔, 히타치, 소니, 도시바 등 유수 기업들도 삼성에 밀렸다. 1위 IBM을 제외한 2~5위 기업들도 보유 특허가 2,000개 밑이어서 추격이 가능한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5위에 오른 후 2007년까지 3위로 치고 올라갈 계획이다. 이를 위해 2010년까지 현재 250명인 특허 전담인력을 650명으로 확대할 방침이다.디자인경쟁력은 이 회사의 수상경력에서 잘 드러난다. 삼성전자는 2001년부터 현재까지 전미산업디자이너협회(IDEA)의 산업디자인우수상을 19번이나 수상해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다른 국제디자인상을 더하면 무려 100여개의 상을 받았다. 이 정도면 어깨를 펼 만도 하지만 이건희 회장의 생각은 다르다. 애니콜을 제외하면 일류 디자인이 없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이에 따라 삼성은 연내에 현재 500명 수준인 전문인력을 600여명으로 늘리고 15~20% 정도인 아웃소싱 비율을 2~3년 내에 30~40%까지 높일 방침이다. 2007년까지 글로벌 톱에 오른다는 야심찬 청사진도 제시했다.삼성전자의 올해 경영방침은 ‘글로벌 일류기업 구현’이다. 이를 위해 안정적 성장기반을 강화하고 경영효율의 초일류화를 실현하며 미래에 대비한 역량을 확충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