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관계사가 들어선 건물 바로 앞에 서 있는 삼성 표지판이 최근 바뀌었다. ‘삼성 중국본부’에서 ‘중국 삼성본부’로 간판을 바꿔단 것. 지난 1월 삼성의 중국사업 총사령탑에 취임한 박근희 삼성 중국본부 사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삼성의 중국회사라기보다 중국 속에 제2의 삼성을 건설하자는 겁니다.”(박근희 사장) 한국의 중국지사가 아니라 중국판 삼성을 만들겠다는 것이다.지난 6월13~14일 베이징에서 삼성의 중국지역 전략회의가 열렸다. 삼성전자, 삼성SDI 등 삼성의 18개 관계사 중국 현지법인장 등 110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박사장은 “중국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기업, 중국사회에 기여하는 기업이미지를 쌓는 데 심혈을 기울여 ‘형제애(Brotherhood) 기업’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며 “악수가 아닌 포옹을 받는 중국기업으로 인정받겠다”고 강조했다.삼성이 중국의 낙후지역에 3년간 45개 초등학교를 건립해 주는 ‘희망 프로젝트’를 지난 4월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사장은 직접 허베이성 탕산시 훠좡초등학교에서 삼성애니콜 희망 초등학교 기공식을 가졌다. 칠판도 없어 시멘트에 흑색 페인트를 칠해 사용해 온 학교였다.삼성 경영진이 학교에 들어서자 길옆으로 늘어선 340여명의 전교생들은 노란 조화를 흔들며 ‘러례 환잉’(熱烈 歡迎)을 외쳤다. 이들은 또 자신들의 얼굴사진으로 ‘三星 Anycall’이라는 글자를 만들고 소망을 적어놓은 ‘소망판’을 선보였다. ‘삼성의 직원이 돼 보답하겠다’는 소망이 눈길을 끌었다. 그들의 눈에 삼성은 사랑하고 싶은 중국기업이 되고 있었다.삼성의 ‘중국기업화’ 뒤에는 물론 한국에서 중국으로의 대대적인 생산기지 이전이 자리하고 있다. 이미 생산법인만 중국 전역 29개에 육박한다. 냉장고 등 백색가전뿐 아니라 첨단 IT제품으로 꼽히는 노트북컴퓨터도 지난해 말을 기점으로 쑤저우 공장으로 완전 이전됐다. 한국에서 구매하는 삼성 노트북도 이제는 ‘메이드 아웃사이드 코리아’인 셈이다. MP3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삼성 중국본부 관계자는 “노트북, MP3 등 5개 품목은 중국에서 거의 생산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윤종용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베이징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삼성전자는 쑤저우에 반도체 조립 및 검사라인, 쑤저우와 항저우에 연구개발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나 당분간은 웨이퍼를 가공하는 전(前)공정 반도체 라인을 중국에 지을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생산기지는 인건비뿐 아니라 운송문제 등 여러가지 요인을 감안해 빠른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며 “반도체 라인도 적절한 기회가 되면 중국으로 이전할 수 있다”며 여운을 남겼다.중국 속 삼성은 중국기업화에 머물지 않는다. 시계를 8개월 정도만 돌려보자. 지난해 10월 삼성전자 글로벌 로드쇼가 펼쳐진 상하이 과학기술관. 전세계에서 모인 주요 거래선과 언론인 600여명이 참석한 이곳에서 최대 80인치 PDP-TV와 57인치 LCD-TV, 세계 최소형 MP3플레이어 등이 소개됐다. 이날 윤부회장은 개막연설을 영어로 했고 사회자도 영어로 행사를 진행했다. 제품소개를 맡은 임원은 중국인인 조우샤오양 상무였다. 중국 휴대전화 마케팅의 총책임자다. ‘한국기업 행사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현대ㆍ기아자동차그룹도 승용차에서 버스, 트럭까지 생산할 수 있는 풀라인업을 최근 구축함으로써 중국 속 현대차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지난 6월21일 중국 남부 광저우시로 날아가 광저우자동차와 상용차 합작법인 설립계약을 맺었다. 이로써 베이징현대차, 둥펑위에다기아로 승용차 생산에 나선 데 이어 상용차 생산기지까지 갖추게 됐다. 중국 언론은 해외 자동차회사로는 처음으로 풀라인업을 갖춘 회사라고 치켜세웠다.지난 4월 현대ㆍ기아차그룹이 중국지주회사를 설립한 것도 중국 속 현대차 신화의 사령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계 자동차업체가 ‘올인’한 중국 승용차시장에서 진출 3년 만에 1위에 등극한 현대차가 상용차에서도 스피드 성공신화를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현대ㆍ기아차는 7월 초 둥펑위에다기아 2공장을 착공하고 조만간 베이징현대차 2공장도 착공해 승용차만으로도 오는 2008년에 100만대 생산체제를 갖추기로 했다.LG전자는 지난 95년 설립한 중국지주회사를 기점으로 곳곳에서 중국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개 현지생산법인에서 3만4,000여명의 중국인을 고용하고 있다. 훼이저우의 CD롬 공장에서 만난 LG전자의 한 관계자는 직원들의 생산성에 만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여직원들의 손놀림을 보세요. 예술 아닙니까.” LG전자는 특히 공장설립 전부터 공회(工會ㆍ중국의 노조) 설립을 지원해 노사가 함께 가는 기업 모델로 떠오르기도 했다.지난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태 때 ‘아이 러브 차이나’ 캠페인을 펼쳐 중국인의 사랑을 받는 회사로 거듭난 LG의 현지화는 생산에 머물지 않는다. 마케팅, 인재, R&D(연구개발)도 현지화 전략의 중심에 있다. 훼이저우와 난징에 가면 볼 수 있는 ‘LG로(路)’는 중국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LG 희망 소학교 기금과 중국판 ‘골든 벨을 울려라’ 프로그램 후원 등도 중국기업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최근 국제탁구대회에서 비친 LG는 이미 중국기업이었다. 한국선수가 낙담하고 중국선수가 환호하는 사진이 함께 실린 적이 있다. 중국선수 유니폼에 선명히 찍힌 LG 로고는 한국선수의 태극기와 묘한 대조를 보였다. LG는 지난해 7월부터 중국탁구국가대표팀을 후원해 오고 있다. 베이징에 짓고 있는 LG 쌍둥이빌딩은 오는 8월 정식 입주를 시작한다. 중국 속 제2의 LG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포스코는 지난 2003년 중국지주회사 설립을 발판으로 현지화 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 철강업체 가운데 중국에 지주회사를 설립한 건 포스코가 처음이다. 계열사를 포함, 29개 투자법인을 운영 중으로 역시 세계 철강업계에서 가장 많다.포스코 중국지주회사를 맡고 있는 김동진 부사장은 “중국에서 엔터프라이즈 시티즌십(entreprize citizenshipㆍ기업시민권)을 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며 “현지화가 이뤄지지 않고는 중국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포스코가 투자한 기업이라기보다 중국회사로 인정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중국은 7월 중 처음으로 내놓을 철강산업 정책을 통해 외자기업의 독자적인 제철소 설립을 불허키로 하는 등 외자에 대한 벽을 높이 쌓을 것으로 알려졌다. 김부사장은 “중국 철강업계의 협력자로 알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강조했다.포스코는 중국 철강업계의 학습대상으로 부상하면서 글로벌 기업 이미지도 구축하고 있다. 후안강 칭화대 교수가 최근 마련한 이구택 포스코 회장 초청 강연회 주제는 ‘녹색 고양이’였다. 덩샤오핑의 헤이마오바이마오론(黑猫白猫論ㆍ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다)이 개혁개방 이후 4반세기를 지도했던 성장숭배주의를 대변했다면 이제는 환경과 효율, 질을 중시하는 새로운 성장모델이 필요하며 그 모범이 포스코라는 게 후교수의 설명이었다. 포스코차이나를 통해 포스코를 찾는 중국인사들만 한 해에 2,000명이 넘는다. 그들에게 포스코는 학습해야 할 글로벌 기업인 셈이다.SK, LG화학 등도 최근 1~2년 사이에 중국지주회사를 설립해 현지화 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게 1992년. 이후 13년간 한국기업이 중국에 투자한 자금은 1,500억달러에 달한다(주중한국대사관 김하중 대사). 한국의 외환보유고에 근접하는 것이다. 대중국 투자의 80%가 제조업이다. 지난해 중국에 투자한 외국기업 가운데 홍콩과 조세피난처 출신을 빼면 한국 국적이 가장 많았다. ‘메이드 아웃사이드 코리아’의 거대한 물결이 중국을 향해 빠른 속도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