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어느 날 금성사의 한 중역이 상공부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정부가 보유한 기업을 민간기업에 불하하는 과정에서 M1소총을 만드는 병기창을 금성사가 인수해 가라는 요청이 떨어졌다. 이 중역은 이를 즉각 구인회 회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사회분위기상 정부의 요청을 기업이 거부하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구회장의 대답은 단호했다.“나는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사람 죽이는 사업을 해서는 돈 벌 생각이 없어요.”LG의 기업문화와 구씨 가문의 경영철학이 어떤 것인지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은 지금껏 LG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정신이다. ‘인화(人和)’ ‘정도(正道)경영’ 등도 따지고 보면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다름 아니다. 이같이 온유한 조직문화가 LG의 내부결속을 단단히 하고,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얻는 데는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냉정한 승부의 세계에서 최고가 되기에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점잖은 모범생’ 같기만 했던 LG가 이제 진화하고 있다. ‘사람’과 ‘윤리’라는 가치를 잃지 않되 그 안에는 강함을 함께 갖춘 모습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LG는 최근 새로운 광고를 시작했다. 텅 빈 백지 한 귀퉁이에 작은 지우개 하나와 ‘Think New’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LG가 그룹 이미지 광고에 호기심 유발형 광고기법을 사용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지만, 그 메시지가 더욱 묵직하다.“2005년은 LG라는 브랜드가 등장한 지 10년이 되는 해이고, 무엇보다 LG가 계열분리를 통해 전자와 화학 중심의 역동적인 회사로 출발하는 원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지우개는 낡은 것은 지워내고 새로운 것을 채워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며,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인 것입니다.”LG측의 설명이다. 정상국 LG 부사장은 여기에 좀더 자세한 해설을 덧붙였다.“지주회사 전환과 계열분리를 통해서 이제는 주력해야 할 대상이 명백해졌습니다. 여기에 집중해서 1등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깔려 있습니다. 생각을 바꿔서 보면 모든 것은 변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위해서 치열하게 덤벼야 합니다. 오늘의 1등이 영원하지는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서 강하고 역동적으로 도전하자는 것입니다.”이 같은 정신자세는 구본무 회장이 95년 취임 때부터 줄곧 강조하고 몸소 실천하려고 한 것이지만, 최근 그 성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시기적으로 지주회사 전환 및 계열분리와 맞물려 있다.한국산업연구원의 김용열 선임연구원은 “최근 2~3년간의 LG는 과거 수십년간의 LG가 아니다”는 말로 놀라움을 표했다.“과거의 LG문화는 성과보다 ‘인화’를 강조하고, 1위보다 공존에 의미를 뒀던 반면, 최근에는 ‘독종 LG’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1위 제품도 많이 나오고 있죠.”그는 다른 계열사들과 함께 먹고 사는 구도가 깨진 만큼 각 사업단위가 어떻게 경쟁우위를 지켜가냐에 따라 그룹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점이 기폭제가 된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지주회사라는 하드웨어와 의식변화라는 소프트웨어가 맞물려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LG의 지배구조 개선작업이 한국형 재벌형태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56년 전 가족경영 회사로 출범한 LG가 지주회사 전환을 통해 재벌기업의 순환출자 관행을 근절하고 나섰다”며 “이를 통해 재벌체제의 취약점이 상당부분 해소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LG경제연구원의 이승일 상무는 “다른 기업에 앞서 이런 체제를 달성한 데 대해 시장의 반응은 일단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우리 경제에서 대기업이 새로운 체질로 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본다”고 의미를 부여했다.”그뿐이 아니다. 사업자회사가 지주회사에 얼마나 배당을 해주느냐에 따라 경영성과를 평가 받기 때문에 전문경영인들의 권한과 책임이 한층 강화된 것도 중요한 변화다. ‘삼성과 현대에는 가신이 있고 LG에는 종친이 있다’는 농담이 있었을 정도로 계열분리 전의 LG는 친족경영의 틀에 묶여 상대적으로 전문경영인들의 입지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구본무 회장 취임 때는 신임회장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회’(會)자 항렬의 원로들이 대거 퇴진했던 사례가 있었다. 이번에는 계열분리를 통해서 구회장의 방계 친족과 허씨 가문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현재 구본무 회장과 친동생인 구본준 LG필립스LCD 부회장 외에 사촌인 구본걸 LG상사 부사장만이 남아 있다.일례로 ‘디지털 CEO’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세계 전자업계에서 이름을 떨쳤던 구자홍 부회장이 LS그룹 회장으로 빠져나간 LG전자의 경우 김쌍수 부회장이 그 뒤를 손색없이 잇고 있다. “나는 LG가 다니기 편한 직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제일 싫다”고 말하는 김부회장은 LG 내부에서도 ‘강한 LG’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히며 전문경영인 전성시대를 열어가고 있다.삼성이 전문경영인체제 구축에 한 발 앞설 수 있었던 이유가 경영진 가운데 친인척이 거의 없었던 것도 중요한 배경으로 거론된다. 열심히만 일하면 누구나 CEO가 될 수 있는 자리가 다른 기업에 비해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 LG 직원들에게도 같은 기회가 활짝 열린 것이다. 자연히 성공과 실적을 향한 동기부여와 내부경쟁이 불붙게 돼 있다. 그리고 이런 불꽃은 LG에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해줄 것이다.2005년은 LG라는 브랜드가 세상에 나온 지 10년이 되는 해다. 구본무 회장은 LG라는 이름과 함께 가업을 이어받았지만, 진정한 구본무 회장의 LG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국기업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가는 LG의 개척자적 행보에 관심이 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