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사업이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석유고갈에 대비한 대체에너지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함에 따라 미국 내 원자력 발전사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그동안 환경단체 등의 압력에 눌려 소규모 발전소조차 건설하지 못했던 미국 내 원자력 사업자들은 이제는 부시 행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대형 원전 건설에 나서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향후 4년간 부시 대통령의 집권 2기는 미국 내 원자력 사업자들에게는 발전소 건설을 통해 커다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지난 11월2일 미국대선이 부시 대통령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국 내 원자력 발전사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전력회사들과 원자로 제작업체들은 서둘러 컨소시엄을 만들었으며, 정부측에 원자력발전소 건설사업과 관련한 각종 제안서를 제출하고 있다.특히 11월 중순 미 에너지부는 신형 원자로 개발사업에 대규모 자금지원을 할 계획이라고 발표, 원자력발전 사업자들은 더욱 들뜬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다. 신형 원자로 개발은 5억달러 이상의 비용이 소요되는 대형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은 필수적이다.미 에너지부 원자력발전담당 윌리엄 매그우드 국장은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의 대안으로 원자력을 선택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미국사회에서 무르익고 있다”며 “행정부 내부는 물론 시민단체에서도 여론이 긍정적으로 흐르고 있어 오는 2014년까지 최소한 2~3개의 대형 원자력발전소들이 건설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원자력발전이 새삼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는 고유가 때문이다. 최근 국제석유시장은 이라크전쟁과 테러위협 등으로 날마다 출렁거리고 있다. 수급불안에 따라 배럴당 50달러를 넘나드는 높은 석유가격 때문에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안정된 대체에너지원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미국인들이 원자력을 주목하는 이유는 가격경쟁력 때문이기도 하다. 원자력은 다른 에너지원보다 가격이 저렴한 게 특징이다. 시간당 1kW의 전력을 생산해 내는 데 원자력은 1달러71센트의 비용이 들어간다. 이는 석탄(1달러85센트)이나 석유(4달러6센트) 등이 같은 용량을 생산할 때 필요한 비용보다 훨씬 저렴한 것이다.특히 지구온난화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면서 석유나 석탄, 천연가스 등에 대한 에너지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당위성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비준에 반대하고 있지만 온실가스 감축을 의무화한 ‘교토의정서’가 내년 초부터 발효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전력회사들은 이산화탄소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 골머리를 앓아왔다. 석유, 석탄 등은 이산화탄소를 대량으로 방출하지만 원자력은 깨끗한 에너지원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구온난화와도 별다른 관련이 없다. 원자력발전이 ‘경제적이며 친환경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현재 미국의 전체 전력생산량 중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 정도다. 이는 다른 에너지원인 석유ㆍ천연가스(17%)보다 높지만 석탄(50%)보다 크게 뒤떨어지는 것이다. 관련업계에서는 효율성 높은 에너지원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확대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미국 내 원자력발전사업에는 대기업들의 참여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지고 있다. 제너럴일렉트릭(GE)과 웨스팅하우스,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 등은 신규사업 채비로 일손이 바빠졌으며,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원자력발전시장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연구개발과 마케팅에서 잰걸음을 하고 있다.이들 기업은 지난 80년대 초반 이후 미국에서는 원자력사업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일반 국민 사이에서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천문학적 사업비용 때문에 투자자 유치에도 어려움을 겪었다.자연스레 원자력발전 사업자들의 눈은 해외로 돌려졌고, 그나마 아시아, 유럽 등에서 그럭저럭 사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GE의 원자로사업부는 대만 등 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원자로 공급사업에 주력, 미국시장에서의 수익성 악화를 모면하기도 했다.그러나 역시 원자력발전사업의 최대시장은 미국이다. 경제력 규모 면에서나 새로운 에너지원을 확보하려는 정부 당국자들의 의지를 감안한다면 미국이야말로 놓쳐서는 안될 원자력시장인 것이다.일부 시민단체들의 반발은 예상되지만 미 에너지부와 원자력발전 사업자들은 이르면 2009년 이전에 ‘원자력규제위원회’(Nuclear Regulatory Commission)로부터 신형 원자로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에너지부는 이와 함께 대부분이 사막지역인 네바다주에 원자력폐기물을 저장, 처리할 수 있는 ‘저장고’를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다. 원자력발전 사업자들은 폐기물 처리, 저장고가 없다면 사업 자체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현재 원자력발전 사업자들은 기존의 발전소 인근에 추가로 시설을 확대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AECL 등이 참여하고 있는 ‘도미니언 리소스 컨소시엄’은 80년 이후 줄곧 원자력발전소가 가동 중인 버지니아주 미네랄시에 원자로 건설을 추진 중이다. ‘뉴스타트 에너지개발 컨소시엄’은 일리노이주나 미시시피주를 발전소 부지로 물색 중이 ‘엑셀론 컨소시엄’은 전혀 새로운 지역을 선정한다는 계획이다.GE, 웨스팅하우스 등 원자로 공급업체들도 바빠졌다. 이들 업체는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미국 내 원자력발전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마케팅에 자금과 인력을 총동원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가동 중인 원자로 103개 중 49개는 웨스팅하우스, 34개는 GE 제품일 정도로 이들은 미국 내 원자로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양대산맥이다.GE는 원자로의 안전성을 최대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기술자가 실수를 범하더라도 원자로 스스로 오류를 찾아내 해결하는 자동제어장치를 널리 홍보하고 있다. GE가 새롭게 디자인한 원자로는 한꺼번에 150만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대용량이며 가격도 이전 모델보다 20% 싼 18억달러로 책정돼 있다.웨스팅하우스의 원자로는 안전성 높은 디자인은 물론 건설비용이 비교적 저렴할 뿐만 아니라 공사기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웨스팅하우스의 신형 원자로는 평균단가가 11억달러로 GE 모델보다 싸다.웨스팅하우스의 스티브 트리치 최고경영자(CEO)는 “웨스팅하우스 원자로는 내년부터 중국의 원자력발전소에 납품될 예정”이라며 “이러한 기세를 몰아 제2의 부흥기를 맞고 있는 미국 내 원자력발전사업에서도 경쟁우위를 점하겠다”고 말했다.그렇다고 이들 원자로 제작업체가 치열하게 다투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GE, 웨스팅하우스, AECL 등은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는 전력회사들의 재정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지분투자와 융자에 적극 나서고 있다. 되살아난 미국의 원자력시장을 잘 가꿔 나가자는 암묵적인 약속이 업계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지난 70~80년대 원자력발전소 건설 붐이 일었을 때 전력회사들은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부담을 이겨내지 못해 사업이 좌초되는 경우도 많았다.그렇다고 원자력발전사업에 장애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과 올해 일본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 유출 사고가 발생, 대규모 인명피해가 났던 점은 아직도 미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9ㆍ11테러 이후 테러공포에 떨고 있는 미국인들은 만약 원자력발전소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목표가 된다면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불안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방사능 유출 사고가 거의 없었지만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반대하는 환경론자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과학자협동조합의 핵 기술자인 데이비드 로크바움 이사는 “원자력발전소는 태생적으로 위험한 것”이라며 “신형 원자로에 대한 안전성 실험도 좀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부시 대통령의 재선으로 제2의 부흥기를 맞고 있는 미국의 원자력발전사업.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원으로서 원자력이 어떤 역할을 해낼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