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5일 오전 9시30분께. 청와대의 김만수 부대변인에게 한나라당 관계자의 전화가 왔다. “8ㆍ15 경축사 원고를 미리 좀 받아볼 수 없는가”라는 요청이었다. “행사가 시작되는 10시 이전에는 곤란하다”며 정중하게 거절한 김부대변인은 기념식 시작에 맞춰 한나라당측에 원고를 전해줬다.연설문을 한나라당에 미리 보내주지 않은 이유는 표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문 원고에 대한 언론사 보도시점이 10시로 ‘엠바고’(보도시점 제안)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 그러나 김부대변인이 약간의 ‘융통성’도 발휘하지 않은 것은 삼복더위 속 한나라당과 청와대 사이의 한랭전선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김부대변인은 그후에 “논평이 세기로 유명한 모 부대변인인데 원고 미리 줬다가 어떤 식으로 비판이 나올지 모르는데…”라며 야당의 반응이 몹시 신경 쓰였다는 점을 내비쳤다.주요 행사에 대한 대통령의 연설문은 통상 보안 속에 작성된다. 특히 8ㆍ15 경축사는 과거 정부부터 대국민 메시지는 물론 대북, 미ㆍ일ㆍ중ㆍ러 등 4강에 메시지와 주요 국가적 현안에 대한 국정 최고책임자의 복안과 처리방향이 담겨져 있었다. 대통령의 철학과 단기ㆍ중장기 국정운영방침의 밑그림이 제시되기도 하고 새로운 국정업무를 공개하는 계기도 된다. 연두회견 모두 발언, 3ㆍ1절 기념사, 국회시정연설과 같은 데서도 그때그때 현안에 대한 기본원칙 외에 처리방향까지 언급될 때도 있다.이 때문에 연설문은 밑그림 단계부터 언론의 취재거리다. 대략 일주일쯤 전부터 기자들은 “이번 8ㆍ15 경축사에는 무슨 메시지가 담기나”라며 연설문 작성팀에 접촉하지만 대부분 함구다.노대통령은 8월 첫째주의 휴가를 마칠 무렵부터 8ㆍ15 경축사를 준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병완 홍보수석, 강원국 연설담당 비서관, 윤태영 제1부속실장이 연설문 작성의 핵심멤버. 김종민 대변인과 양정철 국내언론비서관도 작업을 함께했다.경축사 준비가 본격화된 것은 지난 8월8일쯤. 대다수 청와대 담당기자들이 휴가를 마치고 춘추관으로 첫 출근했을 때였다. 이홍보수석은 이날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는데, 경축사에 담길 내용이 주요 관심사였다. 이수석은 경축사 방향을 설명하는 대신 “무슨 내용을 담았으면 좋겠느냐”며 오히려 기자들에게 묻고 메모지까지 꺼냈다. 과잉 제스처이기도 했지만 연설문 작성을 위한 기본 여론조사를 한 셈이다. 일요일인 이날 기자들과 간담 후 이수석은 경축사 상의를 위해 청와대 관저로 노대통령을 찾아갔다.이때부터 연설문 초안작업이 본격화됐지만 관계자들은 “아직 시일이 너무 이르다”거나 “앞으로 몇 벌을 더 구워야 할지 모른다”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노대통령의 입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보안이기도 하고 최종 순간 어떻게 낭독될지도 모른다는 점도 있지만, 실제로 이 일주일 사이에 또 어떤 중대한 일이 발생, 연설문에 담아야 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이때부터 연설문작성팀은 청와대 비서실의 각 수석ㆍ보좌관실별 주요 현안에 대해 파악한다. 여당과 정책공조라든가 여론의 추이도 신중히 고려된다. 이 과정을 거쳐 주요 과제가 추려지면서 행사의 성격과 맞는지 분석된다.지난 8ㆍ15 경축사에 경제문제가 비교적 적게 언급된 것은 광복절이 경제문제와는 직접 관련이 적다는 판단 때문. 그렇다고 국정의 최대 현안인 경제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는 없다 보니 자신감과 희망찾기로 가닥이 잡혔었다.현안 중 짚고 갈 사안이 추려지면 구체적인 언급내용과 표현, 그에 따른 여야 정치권과 언론의 반응, 정부의 후속조치에 대한 토의까지 이뤄진다. ‘독회’라는 이 과정은 최소한 서너 차례 이상 거친다.‘정제된 공식 문건’으로 인정되고 기록으로 남는 것이 대통령 연설문이지만 노대통령은 종종 격식을 파괴한다. 지난 3ㆍ1절 기념사에서는 연설문에 없던 내용으로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신사참배를 겨낭, 직격탄을 날려 양국 외교가를 긴장시켰다. 윤태영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종합적으로 두 차례나 연설문을 만들었으나 3월1일 아침 직접 연설문을 고쳐 썼다. 8ㆍ15 경축사에서는 노대통령이 사전 독회에서부터 “자신감이 강하게 표현돼야 한다”고 미리 키워드를 강조, 실무팀이 여기에 초점을 맞췄다.근래 행정관에서 연설담당 비서관으로 승진한 강원국 비서관은 연설문 작성 업무만 해 왔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대우 근무 경력이 있는 그는 지난해 초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당시 연설문 책임자였던 윤태영 실장 아래서부터 일해와 노심(盧心)을 잘 읽는다.8ㆍ15 경축사를 위해 휴가도 미룬 채 저녁 늦게까지 표현 하나하나에 골몰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