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이 브랜드로 … 매년 20% 이상 성장, 환경보호에도 애정

부림제지의 윤명식 회장(63)이 일하는 사무실은 서울 성수동 행당빗물펌프장 뒤에 조립식 패널로 지어져 초라하다. 10평도 채 안되는 이곳에서 줄곧 생활해 오고 있다. 200여평 되는 부지는 폐우유팩으로 수북하다. 창문은 열어놓기도 힘겹다. 폐우유팩에 남아있는 우유가 썩어 악취가 코를 찌르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윤회장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재활용사업을 한다는 데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충북 음성에서 1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윤회장은 고향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방과 후에는 쇠꼴을 베고 밭을 갈며 집안일을 도왔다. 매개상고 재학 중 주산 2급을 따냈을 정도로 주산실력도 수준급이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주산은 1961년 건국대 경제학과 야간을 다니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 대학 2학년까지 국정교과서와 동사무소에서 경리업무를 봤다. 군제대 후 대학 3학년에 복학해서는 당시 홍익표 국회부의장 아들의 가정교사 생활로 학비를 벌었다. “공인회계사가 되려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 덕에 장학금을 받았죠.”윤회장은 대학졸업 후 대학동창회장의 추천으로 공인회계사 사무실에서 사무장으로 2년쯤 일하다 70년 7월 영풍제지의 경리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창업멤버로 들어가 서울사무소 소장 겸 경리과장으로 일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부업으로 식당, 건설회사 등에서 경리회계업무를 했다. “평내옥, 남강 등 지금도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유명 식당이 제가 당시 경리회계업무를 했던 곳이죠.”윤회장이 총괄해 경기도 평택에 공장을 신축하고 회사 로고도 제작했다. 밤에는 연구실에서 박스원자재 ‘라이나’ 개발에 매달려 1년 만에 성공했다. 그동안 수입에 의존해 왔던 이 제품이 개발되자 업계에서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밤을 새워 제품을 생산하고 낮에는 배달을 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이 계속됐다. 이러한 호황은 2년 만에 역전되고 말았다. 거래처의 부도로 받은 어음이 휴지조각이 되면서 회사는 경영난에 몰리기 시작했다. 은행을 찾아가 회생자금을 요청해 가까스로 5,000만원을 대출받아 회사 정상화에 나섰지만 확연한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얼어붙은 경기로 매출이 생각만큼 신장되지 않아 77년 매각하고 말았어요.”윤회장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회사설립 당시 일정 지분을 갖고 있었는데 영풍제지를 매각하면서 일정액의 지분배당을 받았다. 윤회장은 이 자금으로 81년 5월 박스공장을 인수해 2년 동안 운영했다. 이 공장은 83년 말 업계의 ‘제살깎기 경쟁’으로 버티기가 힘겨워 매각했다. 그리고 이듬해 9월 춘천에 부지 1,300평, 건평 400평 규모의 공장을 1억원에 사 누런색 포장지의 일종인 크라우트 종이 생산을 시작했다. “막상 공장가동에 들어가자 팔리지는 않고 재고만 쌓여가더군요.”영업 때문에 아파트 단지에 들른 윤회장은 폐우유팩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을 보고 폐우유팩을 재활용해 화장지로 만들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길로 공장으로 돌아온 윤회장은 폐우유팩을 재활용하는 기술 개발에 들어갔다. 폐우유팩에 코팅돼 있는 비닐을 제거하는 게 관건이었다. 재활용 화장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코팅비닐을 제거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가성소다액에 담가 끓여보기도 하고 압력밥솥에 쪄보기도 했다.실패의 연속이었지만 윤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6개월 만에 톱니바퀴를 이용해 코팅비닐을 분리하는 팔파기계를 개발했다. 3개월 동안의 시험가동을 거쳐 85년 5월 시제품이 나왔다. 학교에 공문을 보내 폐우유팩 수거에 들어갔다. 하루에 전국에서 5~6t의 폐우유팩을 수거해 재활용 화장지로 만들었다. “출근하면 썩은 우유냄새로 역겹다며 학교에서 빨리 폐우유팩을 가져가달라는 전화가 빗발쳤어요. 1t을 실을 수 있는 트럭 2대로 실어나르는데 너무 힘들더군요.”궁리 끝에 윤회장은 서울 난지도쓰레기처리장의 수집업자를 찾아갔다. 32명이 구역을 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100만원씩 기부를 하고 가격도 높게 쳐주기로 해 폐우유팩을 수거할 수 있었다. “8월 한여름 난지도 쓰레기장에 찾아갔는데 악취로 인해 머리가 아플 정도였죠. 수집업자들은 첫인사로 욕부터 하더군요.” 지금은 추억이 됐지만 당시에는 설득하고 달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폐우유팩으로 만든 화장지는 냄새가 나는 등 품질이 떨어졌다. 그래서 미국에서 우유팩을 만들다 남은 자투리를 들여와 이를 섞어 화장지를 만들었다. 윤회장은 냄새도 없고 인체에 해로운 형광물질이 없는 화장지를 개발, 특허등록을 했지만 ‘공정상 특허요인이 없다’는 이유로 특허등록을 받지 못했다. 이후 윤회장은 어려움에 처해 결국 96년 6월24일 부도를 내고 말았다. 부도금액은 6억원 남짓.“우리 회사가 생산을 하자 중견 규모의 제지업체들이 직원들을 빼내 폐우유팩 재활용 화장지를 만들기 시작했더군요. 폐우유팩값과 수거비용이 오르면서 자금압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소비자들도 재활용품을 쓰지 않으려는 풍토도 한 원인이었죠.”부도 이후 집은 채권단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난장판이었다. 이때 아내의 용기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회사일에 한번도 관여하지 않았던 아내가 직접 채권단회의를 주도하며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아내는 몇해 전 남편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금(100냥)과 임야, 점포 등 전재산을 처분했다.“회사 부도소식이 알려지자 김천주 주부클럽연합회 회장이 사무실에서 축 처져 있는 저를 찾아와 용기를 불어넣어주었어요.” 김회장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재활용 업체인 부림제지(당시 능림제지)를 살려야 한다며 시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서울시청을 찾아가 호소하고 언론매체를 통한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전개한 것.“회사살리기 운동이 한창 벌어질 때 아내는 “찾지 말라”는 메모 한 장 남겨놓고 훌쩍 산사로 들어갔어요. 일주일쯤 뒤 전화통화가 돼 돌아오라고 애원했죠. 아내와 어머니 산소에 찾아가 부둥켜안고 실컷 소리를 내 울었어요.” 윤회장은 “당시 미어지는 가슴에 통증까지 오더라”고 회고했다.회사 살리기 운동이 전개되자 종교단체와 대기업들도 제품을 사주겠다며 나섰다. 그러면서 회사의 매출도 40억원대로 회복,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또 한번 윤회장의 목줄을 잡아당겼다. 거래은행에서 2억여원의 대출금 상환 압박이 들어왔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자 거래은행측은 춘천공장을 98년 6월 경매에 넘기더군요.” 윤회장은 “이때 사업을 왜 시작했는지 하는 후회로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 화장지 원단사업을 떼어내 매각하고 폐우유팩 수거와 화장지 가공만 하기 시작했다. 윤회장은 학창시절 친구들이 코가 크다며 부른 별명 ‘코주부’를 브랜드로 개발했다.마케팅을 강화하자 생활협동조합, 환경단체, 관공서, 군대를 중심으로 판매가 부쩍부쩍 늘기 시작했다. 매년 20% 이상 성장했다. 폐우유팩 수거도 전국의 아파트 단지를 통해 월 250~300t을 수거했다.윤회장은 앞으로도 환경보전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칠 생각을 갖고 있다. 몇해 전부터 서울 서초구 우면산 보호를 위한 트러스트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15억원의 기금 마련을 목표로 하는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윤회장은 회사를 대표적인 환경기업으로 육성해 정부와 서울시, 구청 등에 회사를 헌납하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제품 하나하나에 책임지겠다는 다짐으로 제품 포장지에 제 얼굴사진을 넣었죠.”윤회장은 올해 매출목표 40억원 달성을 위해 폐우유팩 분리작업을 해야 한다며 악취가 가득한 집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02-2299-2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