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화는 고이즈미정권 마지막 승부수 … 정치권·민간기업 반발이 변수

외국인이 일본에서 살다보면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한번쯤 얼굴을 붉히고 언쟁을 하게 되는 곳이 바로 우체국이다.우체국은 동네 구석구석까지 들어와 이용이 편리하다. 하지만 외국인의 경우 예금계좌를 개설하려고 하면 요구하는 서류가 많고 까다로워 창구직원과 말씨름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불친절해서가 아니라 우체국 규정 자체가 융통성이 없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정해진 규정 아래 맡은 일만 하는 관료주의 체질이 몸에 배어 있다. 시골이나 인구감소지역의 경우 하루 종일 이용객이 10여명이 안되는 곳도 수두룩하다. 근무하는 사람보다 이용자가 적은 곳도 있다.일본 우정공사는 전국적인 규모를 갖춘 거대 공룡조직이다. 우체국수는 2만4,176개로 전국의 은행 점포수(2만6,394개)와 맞먹는다. 우편저금 예금잔고는 227조엔(2004년 3월 말 기준)으로 일본 최대 시중은행 미즈호은행의 예금잔고 67조엔의 4배에 달한다. 우체국에서 취급하는 간이보험 총자산은 121조엔이 넘어 1위 생명보험회사인 일본생명의 45조엔보다 3배나 많다. 직원수는 무려 27만명이 넘는다.2003년 4월 우정공사 체제로 바뀌었지만 아직은 기업 마인드가 부족한 셈이다. 새해 들어 이러한 우정공사에 혁명적인 변화 바람이 불고 있다. 일본 정부는 거대 조직인 우정공사를 민영화하기로 확정, 본격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2003년 4월 출범한 우정공사가 변혁의 전주곡이었다면 민영화는 ‘메인 게임’이 된다.실제로 우정공사 설립 후 수익확대를 위한 사업다각화가 활발히 추진되고 있으며, 일선 점포에서는 서비스가 개선되는 등 변화 조짐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우정공사가 신규 수익원의 발굴을 위해 선보인 첫 번째 카드가 바로 택배사업 확충이다. 전국망을 갖춘 우체국 조직과 직원을 활용, 민간회사들이 장악해 온 택배시장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우정공사가 타깃으로 하는 회사는 택배업계 1위인 야마토운수다. 우정공사는 야마토를 따라잡기 위해 로손, AMPM, 데일리 야마자키 등의 편의점과 손잡고 택배서비스를 시작했다. 우정공사는 야마토운수와 제휴관계를 맺었던 로손을 2003년 11월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로손의 전국점포는 8,000여개에 달한다.우정공사는 편의점업계와의 제휴 확대뿐만 아니라 가격전쟁도 선언했다. 야마토 등 기존 택배회사보다 평균 20% 가량 싼 가격으로 택배서비스를 하고 있다.우정공사와 민간기업과의 대결은 앞으로 다양한 분야로 확대될 전망이다. 우정공사가 관료조직의 비효율을 뿌리 뽑고 완전한 민영화에 성공할 경우 경쟁력이 커질 게 분명하다. 우정공사 민영화가 완료되는 2017년에 4개 민간회사를 합치면 연간 3,000억~9,000억엔의 세후순익을 거둘 것으로 정부는 예상하고 있다. 우편회사의 국제물류사업 진출, 창구회사의 주식중개 및 투자신탁 상품판매 등 다양한 신규사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민영화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고이즈미 총리 스스로 우정 민영화를 ‘구조개혁의 완성’이라고 부를 만큼 민영화 완성을 위해서는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3월 중 예정된 우정 민영화 관련법안 제출을 앞두고 여당인 자민당 내에서 반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정치권 일부에서는 ‘우정 민영화 국회 해산’ 얘기마저 거론되는 상황이다.우정 민영화는 2007년까지 우정공사를 폐지해 창구서비스, 우편, 우편저금, 우편보험 등 4개 주식회사로 분사하고, 그 주식을 보유하는 지주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다.지주회사 주식은 정부 보유지만 2017년까지 10년에 걸쳐 매각해 완전 민영화를 시행한다. 그렇지만 창구서비스와 우편사업은 정부 보유분을 남겨둬 공적기능을 담당하게 할 방침이다.일본 정부는 우정 민영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우선 우정공사의 4개 기능에 맞게 회사를 만들어 다양한 양질의 서비스를 싼 요금으로 서비스하고, 효율적인 운영으로 국민부담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또 공적기관에 묶여 있는 자금을 민간금융시장으로 돌려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지난 2월18일 각료회의에서 확정된 우정공사 민영화의 기본 골격은 고이즈미 총리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결정됐다는 후문이다. 금융사업부문을 장기적으로 완전 분리하려는 데 목적이 깔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정부 원안에 대해 총무성 등 상당수 관료와 우정공사측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초대 우정공사 사령탑을 맡고 있는 이쿠다 마사하루 총재는 민영화를 지지하지만 4개 사업을 별도회사가 아닌 통합회사 형태로 운영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그러나 회사를 그대로 묶어둘 경우 우편부문 적자를 우편저금이나 간이보험의 이익으로 보전하게 돼 실질적인 구조조정 효과가 없다는 게 정부 내 실무추진단의 판단이다. 후쿠이 일본은행 총재도 지금까지 민간금융시스템 밖에 있던 우편저금, 간이보험을 시장에 흡수하려면 완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일본 우정공사가 민영화 목표를 달성하려면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우선 우편저금과 간이보험회사의 취급상품 범위가 논란거리다. 우정공사측은 세제 등 기존 특권은 유지하면서 취급상품을 민간금융기관 수준으로 대폭 늘려줄 것을 요구, 특혜 시비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또 350조엔에 달하는 거대한 우정공사 자금의 운용방법도 관심거리다. 현재 재정투융자 형태로 국채매입이나 공공사업 등에 주로 쓰여 국민들이 맡긴 자금의 상당액이 부실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게이오대 교수는 “전체 예탁자금의 40% 가량이 불량채권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민영화 후 회사별로 차별화되는 직원들의 처우문제도 갈등 소지를 안고 있다. 규모가 가장 큰 창구 네트워크 회사는 공익적 성격이 강해 수익성이 매우 낮다. 이 경우 분리되는 회사별로 직원들의 승진이나 임금에 차이가 나게 돼 4개 사업별로 직원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급여수준을 어떻게 책정할지 어려움이 예상된다.따라서 우정 민영화 결과는 고이즈미 정권의 운명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민영화에 성공할 경우 지지부진하던 고이즈미 총리의 개혁작업은 상당한 결실을 맺게 된다. 지난해 이후 회복세를 보이는 일본경제는 본격적으로 성장국면에 접어들 가능성도 있다.반면 정치권의 반발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간다면 총리 스스로 임기를 채우지 못할 수도 있다. 자민당 내에 고이즈미 총리를 이을 뚜렷한 인물이 없기 때문에 국회해산을 통한 재선거가 실시될 경우 50년 만의 정권교체가 성사될 가능성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돋보기 우정사업 개혁의 역사1996년 시동… 2017년 민영화 완료일본의 우정사업 개혁은 1996년 제2차 하시모토 내각의 중앙부처 재편작업이 시발점이 됐다.일본 정부는 98년 제정한 중앙성ㆍ청 등의 개혁 기본법을 바탕으로 국가에서 직접 운영 중인 우정사업을 공사화하기로 기본방침을 확정했다. 2002년 ‘일본우정공사법’과 함께 우편사업에 민간사업자 참여를 가능하게 한 ‘신서편법’ 제정으로 구체적인 틀이 마련됐다. 이어 일본 우정공사는 정치권의 반발 등 우여곡절을 거친 후 2003년 4월 공식 출범했다. 고이즈미 정권은 우정공사의 완전 민영화를 위한 작업을 2004년 4월 시작, 올 2월 최종안을 확정했다.3월 중 국회에 제출될 예정인 우정 민영화 관련법안의 골자는 우정공사를 사업별로 4개 회사로 쪼개는 것이다. 정부가 주식을 보유하는 지주회사 아래 창구 네트워크, 우편, 우편저금, 우편보험회사 등을 만들 계획이다. 일본 정부는 2007년 4월까지 4개 민간회사를 출범시킨다는 일정을 제시해 놓고 있다. 10년에 걸쳐 민영화 작업을 단계적으로 실시, 2017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민영화에 따라 현재 공무원 신분인 직원들은 민간인이 된다.그러나 국회 법안 제출을 앞두고 여당인 자민당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커 목표대로 올 상반기 중 입법화가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고이즈미 총리의 임기가 올 9월 말까지여서 최악의 경우 민영화 일정 자체가 연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