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명도 구조조정 차원에서 내보내지 않아... 9년째 무분규 임금협상 타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기업문화는 질적인 변화를 겪었다. 당시 국내외의 여론과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해 경영난에 빠진 많은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금융권에서는 수많은 직장인들이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고 말았다.직장을 잃었든 그대로 유지했든 사람들은 결코 지금의 일터가 평생직장으로 나를 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한번 들어간 직장에서 평생 일하는 것을 당연시했던 세대에게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고 시장가치를 높여 경쟁에서 살아남지 않는다면 언제 일터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마치 왕에 대한 민심의 이반이 일어나듯 회사에 대한 구성원의 충성심도 종적을 감추게 됐다.현대중공업(대표이사 사장 최길선)은 7월25일 대규모의 노사화합 잔치를 벌였다. 임직원을 비롯해 구성원, 직원의 가족, 공장 인근 주민들까지 3만여명이 사내 운동장에 모였다. 500cc 생맥주가 4만잔, 탱크로리 3대가 동원됐다. 김밥은 1만3,000줄, 길이로 환산하면 2.6km에 달하는 김밥이 배달됐다. 참가자들이 앉을 돗자리는 가로 세로 10m짜리 140개를 준비했으며 이는 축구장의 2.2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이밖에도 수박 1,200통, 바나나 1만개, 밀감과 옥수수 각각 2만개, 김치 1t, 마른안주 2t 등의 식음료를 마련했다. 이들 안주거리를 운반하는 데 동원된 차량은 2.5t 트럭으로 28대였다. 맥주업체는 “창사 이래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이 정도 되면 가히 노사화합 잔치로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규모이다. 노사 창립 기념행사와 함께 치러진 이날 잔치에는 관악단 연주, 사물놀이 공연, 합창단 공연, 연예인 초청공연, 노래자랑, 불꽃놀이, 레이저쇼 등 다채로운 행사가 잇따랐다.회사에서 특별히 성대한 노사화합 잔치를 벌인 것은 올해로 9년 연속 무분규 임금협상을 타결지었기 때문이다. 강성 노조로 유명한 울산지역에서, 그것도 올해처럼 노사분규가 잦았던 해에 노사가 마음을 합쳐 무분규 임금협상을 마무리한 것을 자축하는 행사였던 것이다. 노종규 총무부장은 “임금협상이 끝난 뒤 ‘화합의 장을 마련하자’는 회사의 제의를 노조가 받아들여 잔치를 열게 됐다”며 “이번 잔치가 제2의 도약을 다짐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이 회사가 9년째 무분규 임금협상을 타결짓게 된 특별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비해고방침의 유지와 근로자들의 복리후생에 대해 사측이 각별한 관심과 투자를 보이기 때문이다. 회사는 고용안정을 최우선시하는 경영철학에 기초해 IMF와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단 1명도 구조조정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정규직의 인력분포에서 20년 이상 된 장기근속자는 9,000명을 넘어 그 비중이 가장 크다. 16~20년 된 근속자도 7,800여명에 달한다.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임금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는 장기근속자를 유지하는 것은 회사의 입장에서 큰 결심이 아닐 수 없다.비해고방침은 사실 웬만큼 수익성이 따라주는 회사가 아닌 한 지켜내기 어려운 방침이다. 초일류기업이라고 일컬어지는 회사에서도 불황을 피해가기 위해 수시로 구조조정을 단행하곤 한다. 현대중공업같이 해고하지 않고도 버텨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인력감축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일시적인 구성원의 동요와 충성도의 하락을 각오해야 한다.현대중공업의 울산 본사는 말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자체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구성원은 회사의 각종 문화시설과 의료시설을 이용하고 주부대학, 자녀캠프에 참가하며 다양한 체육행사를 가족들과 함께 즐긴다. 3년 이상 근무한 경우에는 자녀교육비도 대학까지는 회사에서 대부분을 지원한다. 의료비도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건강보험급여 전액을 회사에서 보조한다.비단 구성원뿐만 아니라 현대중공업은 지역사회를 위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울산에는 많은 제조업체들이 있지만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는 명실상부한 향토기업은 현대중공업이다. 울산 동구의 교통, 문화, 예술, 환경 등은 현대중공업의 커뮤니티인프라 무상지원에 의해 개선된 부분이 크다. 회사는 3,000여억원을 투자해 도서관, 도로개설, 등대, 주차장 등을 지원해 왔다.현대중공업은 세계적인 규모의 조선회사답게 모든 것이 매머드급이다. 이번에 개최된 노사화합 잔치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미 세계 최고로 기네스북에 오른 분야가 있다. 바로 산업시찰 방문객 숫자이다. 이 회사는 지난 92년 처음으로 세계 최고의 방문객 초빙기업이 된 데 이어 연속해서 11년째 그 기록을 스스로 경신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하루 평균 565명, 연간 20만명이 넘는 학생, 관광객, 시찰단 등이 현대중공업을 방문했다.이 같은 규모는 상징성을 주었고, 이에 걸맞게 이 회사의 노조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95년부터 과감한 노사관계의 개혁을 시도하고 나섰다. 가장 먼저 선언한 것이 바로 구성원이 평생직장으로 여길 수 있도록 고용보장을 선언한 것이다.노사가 합의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해고하지 않는다는 방침의 정립은 구성원에게 심리적으로 주는 안정감이 대단히 크다. 노조도 이에 호응해 지난해에는 13년 만에 처음으로 조합비를 0.9%포인트 낮추면서 스스로의 개혁에 나서고 있다. 전국적인 노동조합단체의 주장보다는 조합원의 정서와 회사 실정을 감안한 상생의 노사관계를 내세우고 있다.훌륭한 일터(GWP)의 기본은 구성원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이다. 그러므로 최대한 고용안정을 보장한다는 얘기는 그 어느 부분보다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대목이다.현대중공업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2001년 말 기준으로 15.7년이다. 이는 전국 400대 상장기업 가운데 6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공기업들을 제외한 순수 민간기업으로는 가장 긴 근속연수에 달하는 수준이다. 30대 기업과 동종업계에서도 가장 높은 수치로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입사 5년 내의 이직률이 높은 현실에서는 매우 의미 있는 수치이다.비단 비해고방침의 유지만으로 무분규 임금교섭이 9년째 이어질 수는 없을 것이며 다양한 복리후생의 측면이 현대중공업을 일하기 훌륭한 일터로 만들고 있다. 이는 수주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가능해진 것이겠지만 결국 구성원의 자발적인 협력을 이끌어냄으로써 생산성을 더욱 높이는 선순환구조로 연결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