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초부터 논의만 되다 유야무야됐던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했으며 망국적인 부동산투기를 뿌리뽑기 위해 부동산실명제도 시행했다. 또 은행장 선임자율화와 금리자유화를 통해 금융개혁의 초석을다듬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과 선진국 진입에 걸맞는외환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외환자유화도 추진하고 있다. 때로는 장기판의 졸처럼 꾸준하게, 때로는 장기판의 차나 포처럼 격렬하게「개혁의 사도」임을 과시해 왔다. 그는 축구에서 공격과 수비가능한 선수인 「리베로」로 비유된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모두거친데다 시중은행장까지 역임한 독특한 경력을 바탕으로 경제전반은 물론 금융에까지 해박한 지식을 갖고 막힘없이 업무를 처리하고있어서이다.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기획원과 재무부가 합쳐친재경원을 쇳소리 없이 1년동안 꾸려온 것도 그였기에 가능했다는소리도 듣는다. 홍부총리는 과거 군사정권 때까지만 해도 음지에서만 맴돌다 문민정부 출범이후 재무부장관에 발탁돼 재경원장관까지올랐다. 대기만성의 표본으로 일컬어지는 홍부총리,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파문으로 국내외가 어수선한 가운데 그를 만나 「늦복」이 터지게 된 성공의 비결을 들어봤다.▶ 김영삼정부 출범이후 가장 장수하면서 경제개혁정책의 물줄기를 잡아온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것도 재무부장관에서 경제기획원장관,재정경제원장관으로의 승진을 통해서 말입니다. 특별한 장수비결이라도 있는지요.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김대통령의 개혁의지를 뒷받침한게 신임을받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금융 부동산의 양대 실명제를 실시할 때 일부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방안을 마련해 결국 개혁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지요. 김대통령은 변칙적인 일이나 하기 어려운 일을 주문하지 않아 호흡을맞춰 업무처리하기가 쉬웠습니다.▶ 외환은행장에서 재무장관으로 영전하실 때 김영삼 대통령에게 발탁된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재기 전주택은행장이 추천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요.글쎄요. 14대 대선기간중 김전행장의 주선으로 김영삼 후보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때 김대통령을 처음으로 직접 뵐 수 있는 기회가됐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장관임명 때는 다른 채널을 통한 보고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결정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총리의 관료경력을 보면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무장관시절 「음지·양지론」을 주창하고 재무부의 꽃이었던 「이재국」의간판을 내렸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한번도 하기 힘들다는 기관장을 6번이나 해 「늦복」이 터졌다는 평가가 있습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지로 생각하는 자리에 가서도 능력을 완전연소해 맡은 일을 성실히 끝냈던 것이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제가 영국 재무관을 마치고 관세청 관세감독관으로 전보됐을 때는무척 답답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살이가 양지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음지에 있더라도 이를 적극 활용하면 화가 오히려 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관세청에 있었던 인연으로관세국장과 관세청장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었으니까요.◆ 「완전연소」로 음지에서 양지로▶ 재무부장관 취임이후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현직 은행장 12명이중도에 퇴진하는 「불상사」가 있어 재무부 퇴임관료들이 상당히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재경원 출범 때도 많은 공무원들이 평생직장을 떠났는데요. 이런 경우에도 음지·양지론이 적용될 수 있겠습니까.무척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조직을 이끌어가는 책임자로서전체를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이 있었음을 이해해 주길 바랄뿐입니다. 정부조직개편 이후 많은 공무원들이 평생직장을 떠나게 된것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공무원 대부분이 차관 장관을 목표로 관료생활을 시작하는데 말입니다. 함께 일하던 은행장이나 동료들이중도퇴진할 때는 밤잠을 설칠 정도였습니다.▶ 지난해 12월3일 정부조직 개편방안이 발표된 지 1년이 지났습니다.재정경제원의 초대장관으로서 조직개편의 공과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재정 세제 금융 등 주요 거시경제 정책수단을 함께 갖게 됨으로써종합적이고 원활한 정책수립과 조정이 확보됐다고 봅니다. 타부처에 비해 재경원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해져 재경원에 대한 견제능력이 약화될 가능성이 있으나 경제장차관회의나 국무회의에서 충분한 협의가 이뤄지기 때문에 우려할 사항은 아닙니다.▶ 재무장관으로 취임하기 직전 한국경제신문에 몇편의 칼럼을 게재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중 「금융인의 꿈」이란 글에선 서울을 국제금융센터로 육성한다는 꿈을 거론하셨는데 재무장관과 부총리를 역임하면서 얼마만큼 이에 접근했다고 보십니까.지난 66년 시티은행 도쿄은행 등 외국은행이 국내에 지점을 내기시작하면서 서울도 국제금융센터로 발전해야 한다는 꿈을 갖게 됐습니다. 당시엔 이같은 생각이 그야말로 꿈에 지나지 않았지만 장기적 구상을 갖고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일본만은 못하더라도 홍콩정도로는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아직도 갈길이 먼 것은사실이나 반쯤은 왔다고 봅니다.▶ 「2·6·2법칙」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조직을 이끌어 가는선두 20%에 못지않게 중간 60%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뜻을 피력하신것으로 아는데요. 재경원에도 이런 법칙이 적용된다고 보십니까.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집니다. 60%에 해당하는 중간층이 위기의식을갖는게 중요합니다. 세계화를 위해 공무원의 20%가 뛰고 있는데60%가 뒤에서 발목을 잡는 일을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얘기지요.▶ 「개혁은 장기판 졸처럼 한다」는게 신념이신 것으로 압니다. 개혁은 사정에 따라 옆으로 가는 일은 있어도 뒤로 후퇴할 수는 없다는뜻에서라지요. 이 원칙에 의해 금리자유화와 은행인사자율화 및 외환자유화 등을 착실히 추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는 졸이 아닌 차나 포처럼 전격적으로 시행한것 같습니다.아직도 국민이 놀랄만한 개혁과제가 남아있습니까.경제정책은 경제나 사회처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입니다. 한번 개혁했다고 해서 다 끝났다고 할 수는 없으며 상황이 바뀌면서 계속개혁과제가 생긴다고 봅니다.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파문으로인해 금융실명제 비밀보장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는것이 대표적인 예지요. 극단적으로 말해 마약자금이나 간첩자금을금융기관 종사자가 인지해 이를 사직당국에 신고하면 현재는 처벌받게 돼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점차 고쳐나가야 합니다.◆ 규제완화로 열린 사회 만들어야▶ 김영삼정부가 내세운 개혁과제중에 행정규제완화는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정부는 규제를 많이 풀었다고 발표하는데도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지수는 높지 않다는 얘기지요.규제완화는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규제가 완화되면 부도가 늘어나는 등 피곤한 것은 사실이나 경쟁이 장기적으로는 경제를 이끌어가는 힘입니다. 정부의 규제울타리를 지속적으로풀어 열린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다만 수도권 집중억제와 환경 및 중소기업과 관련된 규제 등은 앞으로도 불가피하게 남아있을것입니다. 공무원들이 자신의 먹이사슬을 유지하기 위해 규제를 풀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혹평이라고 봅니다.▶ 내년 4월 총선때 청주에서 출마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홍부총리의트레이드마크는 「성실하다 청렴하다 도덕적이다」라는 것들인데이같은 덕목은 선거판에선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될 가능성도 높은데요.비자금 정국이 지나가면 새로운 인물에 대한 요청이 높아질 것입니다. 기존 정치인에 대체해서 「깨끗한 정치」를 실현할 인물이 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도 변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틀림없이 올 겁니다.▶ 총선에 나설 경우 그동안 지녀왔던 「비정치적 인물」이란 이미지가 많이 퇴색될 것으로 보입니다.앞으로 성공적으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고 해도 30년간 쌓아온 기록과 생활신념이 깨지고 흐트러지는 것은 아깝다고 봅니다. 정치인이 되려면 좀 바뀌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가능하면 과거 이미지를 계속 유지해 나가려고 합니다. 어떻게 타협하느냐가 힘든 과제이겠지요.고등학교때 화학성적이 나빠 약대진학을 포기하고 상대에 입학하셨고 해군복무때 오범식 전재무부차관의 부름을 받아 관계에 입문하셨다는데요. 재무장관 취임후 『공직은 청지기역이라며 보람있는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무엇입니까.처음 관료생활을 시작할 때 이승만 전대통령이 2백달러 이하의 해외여행경비지출을 직접 사인한 서류를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당시 외환사정이 나빠 아무리 소액이라도 대통령이 직접 챙겼던 것이지요.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외에서 외화를 자유롭게 쓰고외국에서도 돈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동안이같은 발전과정에 직접 참여해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서 보람을느낍니다. 또 극심한 외환위기에 시달렸던 74년 외국 50여개 은행으로 구성된 대출은행단에서 2억달러 차관을 도입, 위기를 넘겼던것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걸면서까지 추진하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얻게 됐습니다.▶ 아쉬웠던 일은 없었습니까.순간순간마다 아쉬웠던 일은 많았으나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IBRD(세계은행)에 근무할 때 공부를 해서 학위(박사)를받지 못한 게 섭섭함으로 남습니다. 또 공무원만 외곬으로 해서 경험의 폭이 좁게 된 것도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