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은행 최대의 위기」. 지난 10월20일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사실로 밝혀졌을 때 매스컴들은 이렇게 대서특필했다.박계동 민주당의원의 폭로대로 노씨의 거액 차명계좌가 이 은행 서소문지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범후 20여년동안 쌓아온 깨끗한이미지는 크게 손상됐다(환경리스크).◆ 금융기관, 무차별 리스크에 빠져있다95년4월6일. 수협중앙회는 외환투자와의 「잘못된 만남」으로 인해1백71억원을 날렸다. 이는 수협 자본금 3백98억원의 절반에 가까운금액. 89년 광주은행이 선물환 거래에서 3백46억원을 잃은 후 단일건수로는 가장 큰 액수다(환리스크). 올 11월초 시중은행들은 기업들이 대출금을 만기전에 갚을 경우 수수료를 부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리가 하향안정세를 보이고 시중자금사정이 풍부해지면서기업들의 대출금 상환이 러시를 이루고 있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만기전 상환리스크).지난 2월 27일은 전금융기관에 최악의 날이었다. 한동안 잘 나가던덕산이 갑자기 부도를 내고 쓰러졌다. 은행 투금 보험 등 금융기관들은 1조원에 달하는 부실채권을 얻어맞고 휘청거렸다. 이 사건이후 은행 투금의 여신담당임원이 대폭 교체됐으며 대한 동양 투자금융에선 사장까지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신용리스크).올들어 금융기관들이 무차별적인 위험(리스크)에 빠져있다. 은행투금 종금 보험 증권 투신 등 덩치의 크고 작음과 영위하는 업무의차이에 관계없이 전방위적 위험에 노출돼 있다. 직면하고 있는 위험도 다양하고 복잡하다. 신용 시장 운영 환경 직무리스크 등….이같은 리스크는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에는 생소한것들이었다. 신용리스크는 이전에도 금융기관을 끈질기게 괴롭히긴했으나 나머지는 이름조차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것들이다.정부가 금리를 정해주는 상황에서 금리변동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4%포인트에 달하는 예대마진이 보장돼 은행은 예금과 대출 숫자를 늘리는데만 힘을 쏟으면 됐다. 만성적인 자금가수요 상태에서만기전 상환은 이뤄질 수 없는 꿈같은 얘기였다. 환율 변동폭이제한되고 파생금융상품 거래가 활성화되지 않아 환차손을 입을 위험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튼튼한 「정경유착」의 고리에 힘입어 「비자금파동」으로 몸을 움츠릴 필요도 없었다.◆ 리스크는 소나기처럼 한꺼번에 온다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지난달 20일부터 요구불예금을 제외한 모든 수신금리가 자유화됐다. 앞으로 금융기관간치열한 수신경쟁으로 예금금리가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반면 대출금리는 하락압력을 받을게 확실하다. 금리변동성이 높아지는 것은물론 예대마진도 줄어들 게 불을 보듯 명백하다. 그동안 보장된 예대마진을 바탕으로 규모만 늘리면 됐던 「땅짚고 헤엄치기식 영업」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환율변동폭도 확대되고 있다. 외환·자본거래자유화가 확대되면서단기투기성자금(핫머니)의 유출입이 잦아지고 이에따른 환율변동이불가피한 실정이다. 지난 1일부터 하루 환율변동폭이 상하 1.5%에서 2.25%로 확대됐다. 달러화와 엔화 환율변동에 영향을 받는 부분도 적지 않다. 지난 8월 엔화 환율이 갑자기 올라(엔화가치 하락)국내은행들이 평균 6억~10억원씩의 환차손을 입은 것이 대표적인사례다.자금시장이 전반적인 잉여상태를 보이면서 중도상환 리스크도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기업들은 지난 11월들어 1주일동안 1천17억원의신탁대출을 만기전에 상환했다. 당좌대출 소진율이 30%대에 머물정도로 자금사정이 좋아서였다. 금융기관으로서는 이전보다 낮은금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새로운 거래처를 개발해야 하는 부담이 추가된 것이다.신용리스크도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전엔 대기업을 상대로 대출했기 때문에 리스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이제는대기업은 은행에서 떠나는 대신 중소기업을 새손님으로 끌어들이려하고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쉽사리 부도내고 쓰러질 위험이 높다. 또 담보를 챙기는 것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됐다. 지난9월 은행의 담보권에 앞서 종업원 퇴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있고나서부터다. 부동산시장이 안정되면서 담보물 처분에도 애를 먹고 있는 실정이다. 대출해준 기업이 망해도 담보만 있으면 꿔준 돈을 받는데 문제가 없었던 부동산 담보에 대한 신화가깨어졌다. 은행이 갖고 있는 부실채권의 담보가치가 7년안에 없어진다는 분석(은행연합회)은 부동산담보가 더 이상 안전판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일은행, 리스크관리 실패로 추락특히 최근의 리스크는 과거처럼 한가지씩 오는 것이 아니라 떼를지어 찾아 온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불행한 일은 혼자서 오는 것이 아니다(禍不單行).올들어 화불단행을 절실히 겪는 곳이 제일은행이다. 제일은행은 올들어 부실화된 유원건설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다가 사후정리조건으로 한보에 넘겼다.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한보가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실명예금을 실명전환해준 것으로 드러나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한보마저 안심할 수 없는 상태다. 한보(6천5백억원)와유원건설(4천2백억원)에 대한 대출만해도 1조원이 넘어선다. 게다가 자금악화로 인해 2차에 걸쳐 1천9백50억원의 협조융자를 받은우성건설에 대한 대출금도 2천억원을 넘겼다. 얼마전 법정관리중임에도 부도를 낸 논노의 주거래은행도 제일은행이다.주가하락에 따른 평가손도 제일은행이 1천7백억원(9월말기준)으로가장 많은 실정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는 것이 없고 하는 일마다 꼬이고 있는 셈이다. 이에따라 지난해 11월까지만 해도 1주당1만4천6백원으로 시중은행중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던 제일은행주가는 7천5백50원(11월11일)으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다.불과 1년만에 「제일」좋은 은행에서 가장 어려운 은행으로 전락한셈이다.◆ ‘리스크는 수익의 원천’금융기관은 리스크를 흡수해 관리함으로써 수익을 얻는다. 리스크를 피하려고만 하는 일반기업과 성격을 달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금융기관은 그동안 리스크 관리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정부규제는곧 보호막으로 작용, 금융기관 스스로 리스크 관리에 나설 필요가없었다. 온실 속의 화초로 커왔다는 얘기다.그러나 상황은 예전과 다르다. 정부가 금융기관의 규제완화 요청을받아들이면서 금융시장에서도 경쟁원리가 적용되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인사 및 자산운용을 전적으로 해당금융기관에맡겨놓되 부실화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책임에는 그동안터부시되던 파산까지도 포함된다. 내년부터 예금보험제도를 도입키로 한 것은 금융기관 파산에 대비하자는 포석이다.리스크는 근본적으로 위험한 것이지만 이를 잘 관리하면 오히려 수익의 원천이 된다. 리스크 관리는 자율화 개방화 시대에 국내금융기관 뿐만 아니라 거대한 외국금융기관과 맞붙어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의 원천이다. 리스크관리. 우리나라 금융기관에 던져진 화두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