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가 세계를 지배한다. 영화 패션 음악 미술 등 문화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경영이나 마케팅에서도 이미지는 무시할 수 없는 가치로 부각되고 있다.무한경쟁시대에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경쟁업체와 뚜렷이 차이나는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품의 질이 아무리 좋아도 내세울만한 이미지가 없으면 소비자의 구매의욕을 부추길 수 없다. 같은청바지라도 리바이스니 캘빈클라인이니 하는 브랜드를 따지게 되는것도 브랜드가 쌓아온 이미지 때문이다.브랜드와 기업의 이미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직업이 CI 플래너다. 생소한 이름의 이 직업은 말 그대로CI(Coporate Identity:기업이미지통합)를 기획하는 사람, 즉 통일된 이미지를 창조해서 기업에 불어넣는 사람을 말한다. 『CI란 기업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시각적으로 표현한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마크를 보고 「아, 그 기업이구나」하고떠올릴 수 있는 기업의 상징이죠. 사람 얼굴 모양의 빨간 원을 보면 LG그룹이 생각난다거나 파란색 타원형을 보면 삼성그룹이 연상된다든가 하는게 모두 CI때문입니다.』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CI 플래너 중의 한 명인 김호진씨(31·디자인포커스 기획팀 과장)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CI가무엇인지부터 설명했다.『CI 플래너는 광고회사의 AE(Account Executive:광고섭외 및 기획담당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차이라면 AE는 한 상품에 대한 광고를 계획하지만 CI 플래너는 한 기업의 장기적인 이념이나 비전이의도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기획한다는 게 다른 점이죠.』김씨가 일하고 있는 디자인포커스는 CI와 BI(Brand Identity:브랜드이미지통합)업무를 주로 하는 디자인회사다. CI 디자인업계에서는 인피니트 디자인파크 심팩트 올커뮤니케이션 등과 함께 5대 디자인회사로 꼽힌다. 디자인포커스는 보람은행 삼성종합건설 (주)청구 등의 CI작업과 카스맥주의 브랜드 작명 및 디자인을 담당했던회사로 유명하다.◆ 패션쇼 등 관람, 디자인 감각 길러디자인회사는 아무리 규모가 커도 전체 인원이 30∼40명을 넘지 않는다. 3∼4명이 팀을 이뤄 한 종류의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에 전체인원이 많을 필요가 없다. 한 팀은 로고나 브랜드가 담아야 할 방향을 기획하는 CI 플래너와 기획된 내용에 맞춰 이름을 짓는 작명가, 만들어진 이름에 시각적인 효과를 부여하는 디자이너 등으로구성된다. 한꺼번에 여러 건의 의뢰가 들어오면 3∼4개 팀이 동시에 조직돼 업무가 진행되기도 한다. 그러나 옆에 있는 팀이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도 잘 알 수가 없다. 그만큼 보안유지가 철저하다.『CI 작업을 하려면 한 기업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사업방향을 모두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기업이 비밀로 하고 있는 사업계획까지도알게 되죠. 그래서 같은 팀원이 아니면 옆 직원에게도 어떤 작업을하고 있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아요. 비밀을 지키는 것도 업무의 하나입니다.』CI 플래너란 직업은 국내에 소개된지 채 10년도 안 된다. CI에 대한 소개 자체가 늦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CI를 단순히기업의 로고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CI플래너와 디자이너에 대한 구분이 모호했다는 설명이다.그래서 CI 플래너에 대한 수요는 늘어나는데 5년 이상의 실무 경력을 가진 전문가를 찾기가 어렵다.기업이미지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지는데 비해 CI 플래너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전망은 밝은 편이다. 또CI 분야는 다른 업종에 비해 창업하기도 쉽다. 자본이나 인원이 많이 필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컴퓨터 몇 대와 인맥」만 있으면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다.그러나 이 말이 곧 누구나 쉽게 CI 플래너가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주 전문적인 일이에요. 대학교에 관련 학과가 있는 것도아니라서 어디서 체계적으로 배울 수도 없습니다. 선배가 하는 일을 따라 하면서 경험을 쌓는게 최선이죠.』체계적으로 배울 수는 없지만 커뮤니케이션과 마케팅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는게 좋다. CI란 한 기업과 소비자의 커뮤니케이션이자 기업이미지를 통한 마케팅 활동의 하나이기 때문이다.디자인 업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고 있어야한다. 일을 맡긴 의뢰인이 디자인 작업이 어느 정도 걸리느냐, 그림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느냐는 등 디자인 업무에 대해 물어올 때정확히 대답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김씨는 디자인 작업이 이뤄지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에 대한 감각도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흔히 말하는 「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완성된 기업 로고나 브랜드를 보고 처음 기획했던 의도가 잘 담겨있는지, 디자인이 잘 됐는지 등에 대해 전문가적인 시각을 갖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디자인에 대한 감을 기르려고 디자인 전문지도 사보고 패션쇼나미술 전람회에도 자주 갑니다. 천부적인 감각이 없으면 노력이라도해야죠.』김씨는 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대학원에서 광고와PR(Public Relations;홍보)를 전공했다. 이후 심팩트라는 디자인회사의 CI기획부에서 3년간 일하다가 지난해 8월 CI 플래너란 직함을달고 디자인포커스로 자리를 옮겼다. 가장 최근에 한 작업은 제화업체인 (주)고려의 슈발리에 브랜드를 기획한 것이다. 4년 경력에연봉은 2천5백만원 정도. 광고회사와 비슷하거나 약간 적은 수준이라고.◆ 작업결과 회사앞날 좌우 부담스럽기도그러나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 CI 플래너란 직업은 일 자체를 좋아하지 않으면 계속해 나가기가 어렵다. 김씨 자신도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를 못이겨 1년간 CI업무를 떠나 있었던 적이 있다. 작업의결과가 한 회사의 앞날을 좌우하고 자신이 기획한 브랜드의 성패에따라 한 기업의 운명이 왔다갔다 한다는 사실이 보람되기도 하지만부담스러울 때도 많았기 때문. 그러나 김씨는 떠난 지 1년이 채 못돼 다시 돌아왔다.『CI 일이란게 묘한 매력이 있거든요. 늘 새로운 기업을 만나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머리 속으로 창조한다는 일, 어느 직업에서나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은 아니쟎아요.』CI 플래너란 상업주의와 예술의 경계에 위치한 신종 직업이란 말로김씨는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