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김경혜씨(47). 집안어른께 연말선물로 약을 구하러 종로 5가로 나갔다. 동네약값보다 싸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종로5가의 M약국에서 노인들 몸에 좋다는 영양제인 D약품의 폴렌이라는약을 샀다. 1백50정들이 한상자에 값은 3만원. 동네약국이 4만원인데 반해 1만원이나 싼값이었다. 약에 붙여진 표준소매가는 5만8천원. 김씨는 나온 김에 다른 가정용상비약과 피로회복제 영양제 등을 마저 샀다. 김씨는 『어떻게 약값이 이렇게 다를 수 있느냐』며『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싸니까 약을 더 샀다』고 말했다. 김씨가 느낀 「이상하다는 생각」은 바로 뒤죽박죽으로 이뤄지고 있는 약값이다.실제로 한일약품공업(주)에서 만든 12정짜리 종합감기약화이투벤-에스의 경우 동대문 D약국에서는 1천5백원, 남대문의 N약국에서는 1천원에 판매되고 있었다. 표준소매가는 3천1백60원으로표기돼 있다. 다른 약품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표시가에 비해「헐값」에 팔리기는 마찬가지였다.이런 「난매」가 성행하는데 대해 약업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왜곡된 유통과정에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단계 유통비용 소비자에 전가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건약·회장 조수월)의 양성주본부장은 『약값문란의 주범은 왜곡된 유통구조이며 그 배후에는 잘못된 약값책정이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양씨는 또 『약값문란의 주범은 따로 있는데 막상 소비자들을 대하는 약사들만이 소비자들의 불만과 불신을 받아왔다』고 말했다.현재 국내 의약품유통구조는 약업관계자들조차 정확한 유통단계를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얽힐 대로 얽힌 실타래처럼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복잡한 유통구조는 제약업체-도매상-약국또는 병원, 제약업체-병의원으로 이어지는 정상통로의 곳곳에서 유통구조를 왜곡시키고 있다.의약품도매업체 B약품에서 근무했던 박모씨(31)는 『약품유통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이익이있으니까 복잡한 중간중간에 브로커 등을 포함한 유통업자들이 존재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복마전」으로까지 불리는 약품유통시장은 박운용씨의 「우리나라의약품 유통구조의 현황과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1994)란 학위논문(인하대 경영대학원 석사)에 잘 나타나 있다. 논문에서 박씨는『의약품 유통구조가 13단계를 거친다』며 『다양한 의약품 유통경로로 인해 의약품의 가격혼란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림 참조)박씨는 또 『13단계중 1∼5단계는 법에서 규정한 정상적인 유통경로이나 6∼13단계까지는 치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변칙적인 유통경로』라며 『의약품 유통구조의 복잡성과 문제발생에는 브로커가 큰 몫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실제로 보건복지부의 국정감사자료에 따르면 지난 94년부터 95년8월말까지 적발된 4건의 약품유통 비리사건에 모두 브로커들이 연루돼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의약품의 복잡한 유통경로는 결국 비정상적인 상거래를 유발하고약품가격구조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아울러제약업체-도매업체-약국 병원으로 이어지는 유통구조일원화가 이뤄지지 않아 제약업체와 약국·병원사이에 수많은 불공정 거래행위가존재하고 있다. 지난 8월에는 19개 제약업체가 병의원을 상대로 리베이트 랜딩비제공등 불법 거래를 해오다 검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할증 할인 등 변칙판매 성행약업계에 알려진 불공정거래로는 할증 및할인 특매 세미나 등을 이용한 의약품 판매와 리베이트 랜딩비 등이 있다. 이러한 불공정거래에 대해 서울시 중구 남대문에 위치한 남시약국의 양경철약사는『대개가 제약업체들의 직거래로 인한 비리』라며 『유통구조일원화가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할증 할인은 주문량에 얹어덤을 주는 것으로 예를 들어 제품 10개를 주문하면 실제로는 15개를 주는 것으로 구매단위에서의 실구입가는 고시가격의 2분의1로 책정돼 약국은 그만큼의 이익을 갖게 된다.특매는 특정회사의 약품을 한꺼번에 사주는 조건으로 실구입가의20~30%에 해당하는 인센티브나 선물 등을 제공받는 거래방식이다.단체로 대량구입하는 특매는 주로 동문회나 지역별 특매가 이뤄지고 있다.세미나 등을 이용한 의약품판매는 특정 약품의 일정구매조건으로제주도 등 관광지에서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향응을 제공하는 판촉수법. 주로 다국적 제약사들이 「애용」하는 거래방법이다.리베이트는 병의원들이 의약품을 사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며 랜딩비는 새로 납품하면서 주로 임상실험비의 명목으로 병의원에 전달되는 돈을 말한다. 이러한 리베이트 랜딩비는 약값의20%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약값문란의 단초인 의약품유통구조의 난맥상에 대해 약업관계자들은 잘못된 약값책정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건약의 양본부장은 『의약품 가격은 공장도가 50~60%에 도매유통이익 10~20%, 30%의 소매이익으로 약값이 구성돼 있다』며 『약값구성부분중 이익부분이 들쭉날쭉해 유통구조가 왜곡됐다』고말했다.양본부장은 또 『이미 병원을 통한 약품소비가 약국을 통한약품소비를 넘어서 보험약품의 5% 이익보장은 터무니 없는 것으로제약업체들은 더많은 마진을 고려한 판매를 하고 있다』고 부연했다.의약품도매협회(회장 이희구)의 유충렬상무도 『근본적으로 약값책정이 잘못돼 있다』며 『이미 30여년간 문란해져있던 유통과정때문에 이를 미리 고려한 약값책정이 이뤄지고 있다』고 약값관리의 허점을 지적했다. 잘못된 약값책정-유통구조문란-약값문란의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설명이다. 유상무는 또 『일부제약사의 경우 약품을그대로 복제해 판매하므로 비용이 얼마 안들지만 시장확대를 위한저가물량공세를 펴면서 약국에 보다 많은 이익을 배정하는 것으로알고 있다』고 덧붙였다.M제약에 영업사원으로 근무했던 우모(30)씨는 『복잡한 유통과정때문에 결국 약값이 부풀려질 수밖에 없다』며 『일부 의약품의 경우보험약값대비 1천%로 표준소비자가를 표시한 약품도 있다』고 말했다.현재 약값책정은 제약업체들이 스스로 책정한 약값을 제약협회에올리면 한국제약협회(회장 이금기)의 가격관리위원회산하 실무위원회에서 동종성분의 약품등과 비교 심의 산정한 뒤 제약업체에 통보해 가격이 결정되는 과정으로 이뤄지고 있다. 제약협회의 한 관계자는 『표준소매가 기준으로 20%안팎에서의 약품판매는 허용되고있다』며 『협회차원에서도 약사회 등과 함께 사후관리로 관리하는정도』라고 밝혔다.약값책정의 문제는 지난 정기국회에서도 문제가 됐다. 의약품가격산정에 특정업소의 의견이 개입되는등 가격산정이 비합리적으로 이뤄진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가격심의 실무위원회에 소비자단체가 참여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여태 소비자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잘못된 약값책정-유통구조 왜곡-약값문란의 악순환에 대해 양본부장은 『약값중 이익부분이 일정해야 하며 제약사 직거래가 없어지고 도매업체들의 자율경쟁이 이뤄져야 한다』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낙후된 유통시장, 외국사들 군침…현재 국내 의약품시장규모는 6조원으로 세계 11위 규모로 성장했다. 외국유통회사들은 성장력에 비해 한국의 의약품 유통구조가 낙후돼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국내에 진출하려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이들은 국내 의약품유통시장의 「중추」인 도매업체들의영세성 등 약점을 노려 집중공략에 나서고 있다.이미 일본 후쿠오카에 본사를 둔 규코사가 동방유량과 합작으로 동방물산을 설립했다. 스위스의 시바헤그너사도 이미 국내 의약품시장 진출을 위한 시장조사를 마친 상태다. 특히 스위스국적의 다국적 약품유통전문사인 줄릭사(Zuellig Pharma)의 한국진출 시도는국내도매업계의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생존」에 위협을 느낀 업계는 완강한 「빗장걸기」로 줄릭사는 한발 뒤로 물러서 있는 상태다. 이 회사는 약품유통에 물류개념으로 무장, 영세한 국내 도매업체들에 커다란 위기감과 함께 약품유통선진화의 필요성을 불러 일으켰다.그러나 줄릭사파문으로 형성된 물류개념의 도입을 통한 유통구조선진화의 필요성도 사업주체가 누가 되느냐의 문제로 아직 갈피를 못잡고 있다. 제약업체들과 도매업체들이 서로 주체가 돼야한다고 주장하며 맞서고 있는 실정이다.결국 유통구조일원화를 통한 의약품유통구조개선은 「염불보다는잿밥」에 눈독을 들인 관련업계의 주도권싸움에 공허한 메아리로그칠 소지가 많아진 것이다. 그만큼 약을 찾는 소비자들이 느끼는「혼란스러운 약값」은 당분간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는 유통시장의 문이 열린 개방화시대에 외국업체들에는「좋은 먹이」라는 얘기다.◆ 줄릭사 파문줄릭사가 한국진출을 위한 3년여에 걸친 사전작업후 첫포문을 연것은 지난 7월. 줄릭사는 거대한 물류창고를 갖고 제약품들을 한곳에서 취급함으로써 물류절감의 시너지효과를 얻을 수 있다며 국내제약회사들을 상대로 동참을 권유했다.줄릭사측과 접촉한 국내 제약사들은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며 엇갈린반응을 보였다.국내 제약업체들은 일단 우려의 반응을 보였다. 신약개발이 전혀없이 로테크제품이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어 하이테크제품을 들여올 경우 국내 제약산업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물류전문사를 통한 의약품 유통구조 개혁의 당위성은 인정하지만 주거래선인 도매업계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현실도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다.반면에 한독약품을 비롯한 외자합작 제약업체들은 긍정적인 반응을보였다. 판매촉진을 위한 인력과 비용등 과도한 판촉비용의 부담을덜고 빠른 자금회전과 판매부담 감소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약업계와 달리 도매업계는 합작물류회사 설립소문이 나돌자마자 한 목소리로 반대하기 시작했다.도매업계는 합작사를 제약사 직영의 대형도매사로 규정짓고 한독약품계열사의 약품거래에 대한 「실력행사」까지 불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당황한 줄릭사와 한독약품은 몇차례 수정안을 갖고 도매업계에 대한 설득에 나섰으나 허사였다. 결국 도매업계의 계속된 반대에 합작사설립을 주도했던 한독약품의 김영진부사장은 사업포기를 선언했다. 그러나 줄릭사파문이 완전히 「꺼진 불」인지는 아직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