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가 있다. 지난해말 서울의 몇몇극장에서 개봉돼 20만명 이상의 관객을 불러모은 화제작이다.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며 70년에 분신 자살한 노동자의 삶을 좇은 영화다. 이 영화에 대우전자가 8억5천만원을 지원했다(비디오판권료 포함). 총제작비 15억원의 절반이 넘는 액수다.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죽어간 노동자의 궤적을 추적한 영화에 대기업이 투자했다는사실. 70년 당시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우전자는 왜이 영화에 8억5천만원이라는 큰 돈을 선뜻 내놓았을까. 답은 돈이다.영상산업은 흔히 황금알을 낳는 21세기 미래산업이라 불린다. 이전에는 영화 한 편 혹은 방송 프로그램 한 편을 제작하면 그것으로끝이었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영상산업은 영화 극장케이블TV 공중파방송 위성방송 음반 비디오 컴퓨터게임 CD롬 극장테마파크까지를 전부 포괄한다. 영화 한 편을 제작하면 음반 비디오 컴퓨터게임에 캐릭터상품까지 모두 만들어 낼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함께 생긴다.◆ 영화, 영상소프트웨어 산업 진출위한 ‘원료’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디즈니사가 94년 개봉한 만화영화「라이언킹」은 거의 10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이중 극장흥행 수입은 1억달러에 불과하다.비디오시장에서는 극장 수입의 3배에 달하는 3억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가수 엘튼 존의 노래가 담긴 「라이언킹」의 주제가 음반은4백90만장이 팔려 디즈니사에 순익만 약 6천만달러를 안겨주었다.「라이언킹」을 소재로한 CD롬 게임과 「라이언킹」의 만화 캐릭터를 부착한 각종 상품까지 등장, 돈을 불러들였다. 극장 흥행 수입 외의 부대 수입이 훨씬 많은 셈. 이 뿐이 아니다. 영화가 히트치면 영화를 주제로한 하이테크 공원이 건설되기도 한다. 「인디애너 존스」와 「쥬라기 공원」을 주제로한 놀이공원이 미국 곳곳에등장해 인기를 끌었던게 대표적인 예다.영화 「스타트렉」을 게임으로 만든 미국의 홀로바이트사의 스티븐와인스타인사장이 『이제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영상소프트웨어산업으로 진출하기 위한 「원료」를 만든다는 의미』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이 너나없이 영상산업에 뛰어드는 이유도 간단하다. 단순히 영화를 제작하겠다는게 아니다. 영화를 기반으로 영상소프트웨어 산업을 선점하겠다는 것이다.지금까지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하드웨어가 일방적으로 선도했다.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사태는 점차 역전되고 있다. 소프트웨어가하드웨어를 움직인다. 누가 우수한 소프트웨어를 갖느냐에 따라 기업간의 파워게임이 판가름난다. 실패하긴 했지만 일본의 소니와 마쓰시타가 할리우드에 진출했던 것도 하드웨어 기술만으론 21세기에서 일류기업으로 살아남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최근 제일제당이 자본을 투자했다 해서 관심을 불러 모은 미국의드림웍스사에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자인 폴 알렌이 투자한 것도비슷한 맥락이다. 흥행의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와 디즈니사에서 각종 만화영화를 성공시켰던 제프리 카젠버그, 데이빗 게펜이 설립한드림웍스의 목표는 단순한 세계 영상산업의 제패가 아니다. 안방에서 개인용 컴퓨터로 영화를 즐기며 자신의 취향대로 줄거리를 만들어 내는 새로운 영상문화의 실현을 영화예술과 과학의 만남을 통해이루려는 것이다.「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의 키스」라고 표현되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컴퓨터 천재 빌 게이츠의 결합은 더 이상 하드웨어와 분리된 소프트웨어 혹은 소프트웨어 없는 하드웨어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증명한다.국내 대기업의 영상산업 진출도 같은 배경을 깔고 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결합을 통한 「수직계열화」를 꿈꾸는 것이다. 하드웨어 개발이나 CD롬 게임기 제작 수준에서 벗어나 그 내용까지장악하겠다는 의도다. 수직계열화란 하드웨어 업체가 비디오 제작및 유통, 외화 수입, 영화 제작 지원 및 배급, 극장사업 등 영상관련 산업 전부를 총괄함으로써 최대한의 시너지(Synergy) 효과를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만화영화(애니메이션)를 제작한 뒤 만화인물을 상품화하는 캐릭터 산업과 테마파크 사업까지로도 진출할 수 있다. 테마파크 사업이란 대전엑스포공원이나 디즈니랜드와 같은 놀이 공원을 말하는데 앞으로는 가상현실이나 컴퓨터게임 3차원영상같은 최첨단 시설을 갖춰야 놀이공원으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갖출수 있게 된다. 때문에 테마파크의 성패는 첨단 시설에 제공할 영상소프트웨어를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영상관련사업 통합 움직임수직계열화와 함께 대기업이 영상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또다른 특징은 계열사별로 각개약진했던 영상 관련 사업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다. 전자업체가 담당했던 영상소프트웨어 사업을전자업체에서 분리해내고 있는 점도 최근 추세다. 그룹 차원에서는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하되 하드웨어 담당 계열사와 소프트웨어 담당 계열사는 분리하겠다는 의도다. 하드웨어 산업과는 다른소프트웨어 산업만의 특징을 존중하겠다는 의도다.영상사업 통합에서 가장 발빠르게 움직는 기업은 삼성그룹. 지난해말 삼성영상사업단을 발족시켜 삼성전자 삼성물산 제일기획에서 개별적으로 추진하던 영상 관련 사업을 통합했다.대우그룹은 대우전자 중심으로 영상사업을 진행해 왔는데 올 1월1일부터 모든 영상관련 사업을 (주)대우로 이전했다. 또 우일영상세음미디어 동우영상 등 영상관련 자회사들도 (주)대우로 함께 통합, 영상 관련 사업을 한데 모을 방침이다. 대우는 미국의 메이저사인 콜롬비아 트라이스타 20세기폭스사 등과 계약을 체결해 탄탄한 외화수입 배급망을 갖춘 영화계의 큰 손이다. 최근에는 미국영화사인 뉴라인과도 영화배급 독점 계약을 체결했다. 비디오업계매출 1위이며 영화제작도 대기업 중에서 가장 활발한 편이다.현대그룹은 공식적으로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계열 광고대행사인금강기획을 중심으로 영상 관련 소프트웨어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금강기획을 영상산업의 교두보로 삼아 영화제작을 비롯한 외화수입 및 배급, 극장 체인 운영, 비디오 유통 등 수직계열화 체제를구축키로 한 것이다. 현대그룹은 이를 위해 금강기획에 신사업추진실을 마련하고 영상사업에 대한 중장기계획 수립에 들어갔다.현대그룹은 또 현대전자 미국 현지법인을 통해 미국의 영상사업체를 인수하거나 자금을 출자하는 방식으로 해외 영상 소프트도 확보, 조만간 해외수입배급망도 갖출 방침이다. 투자는 현대전자가하지만 아시아지역 판권운영은 금강기획이 담당하게 된다. 유통망확보를 위해 극장 운영에도 나선다. 올해 서울 압구정동에 극장4관이 포함된 13층짜리 종합 문화공간을 건립하는 것을 시작으로전국에 극장 체인망을 갖출 계획이다. 압구정동에 세워지는 건물에는 극장뿐만이 아니라 가상현실 게임장 시뮬레이션센터 등 각종 첨단 놀이기구가 들어서게 된다.현대그룹측은 『VOD(주문형 비디오) DVD(디지털비디오디스크)등 멀티미디어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영상산업에 참여해야 한다는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LG그룹은 93년도에 설립한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 제작회사인 LG미디어를 통해 영화사업에 진출했다. 프랑스 영화배급사인 CiBy세일즈와 계약을 맺고 짐 자무시 감독의 「데드맨」등 외화 4편을 수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영화업계에 발을 디뎠다. LG미디어측은 『현재는 일단 모색단계지만 한국영화든 외국영화든 좋은 작품이라면 한두편 제작에투자하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LG미디어는 하명중영화제작소 대한영상 미디아트 등과 제휴, 멀티미디어용 CD영화제작과 가라오케용 음반 제작에 주력해 왔던 영상소프트 제작 전문회사다.선경그룹의 SKC는 삼성 대우와 함께 비디오 시장의 삼대 세력중의하나다. 자회사인 서륭프로덕션을 통해서도 비디오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서륭프로덕션이 3억을 출자해 설립한 미도영화사는 영화제작을 지원하고 외화를 수입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남부군」과 「아래층 여자 위층 남자」가 선경이 지원한 영화다.◆ 전문가 양성과 지원이 ‘보물’생산한다대기업이 영상산업에 참여하는 배경에 대해 삼성영상사업단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국내 영상산업은 이제 대기업이 나서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영상관련 사업은 몇 년간 계속적인 적자를 감수하면서 투자를 감행할 수 있는 자본력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국내에대기업말고 누가 그 일을 떠맡겠는가.』영화계에서도 대기업의 영상산업 진출에 대해 왈가왈부할 단계는지났다고 인정한다. 지난해 개봉된 국내 영화 제작비의 50%이상이대기업의 주머니에서 나온 상황에서 된다 안된다는 논쟁은 의미가없는데다 영화인 스스로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문제는 대기업의 기대대로 영상산업이 정말 노다지인가 하는 의문이다. 물론 고수익산업이긴 하다. 그러나 고위험산업이기도하다. 일종의 도박이란 뜻이다. 영화평론가 강한섭씨는 국내 대기업의 영상산업 진출에 대해 이렇데 꼬집는다. 『미국에서는 어느기업이 영상산업에 진출했다 한면 다음날로 주식값이 떨어진다. 위험하기 때문에 그렇다. 영상산업에 관한한 미국보다는 우리나라가더 위험한데도 우리 기업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강한섭씨는 영상산업에는 자본과 아이디어 두가지가 있어야 하는데우리 기업에는 두가지 모두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자본력도 그다지튼튼하지 못한데다 장기적인 안목도 결여돼 있다. 돈이 된다 싶어뛰어들었다가 돈만 날리고 철수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와 국내대기업의 문화 자체가 영상을 할만큼 감각적이지도 않다.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문화가 아니라는 주장이다.결론적으로 대기업이 고수익만 보고 고위험은 보지 못한채 무작정달려든다는 설명이다.그러나 우리나라가 21세기에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영상소프트산업을 발전시켜야 하고 그러려면 대기업의 참여는필수적이다. 이미 영상산업 자체가 대기업 위주로 재편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단지 영상산업에서 황금산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10년이상 광맥을찾고 파내는 고생을 감수해야 하는데 대기업이 그럴 각오가 돼 있느냐는 것이다. 영상산업은 기본적으로 사람사업이다. 어느 기업이얼마나 우수한 아이디어와 기술을 가진 전문가를 많이 확보하고 있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 장기적으로 사람에 투자해 전문가를 키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뛰어난 전문가 집단에 대기업의 자본과 영상기술이 결합된다면 영상산업에서 보물을 발견하는게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