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가 미국 대통령과 직통전화로 통화한 뒤 정상회담을 결정하고 미국 도착 직후 공항에서 수행원들을 대동하지 않은 채 미대통령을 만났다.』가이후 전총리가 재직중이던 지난 90년대초 일본관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사건」의 골자다. 일본내 문제로만 끝나지 않고 한때는 미·일간에 미묘한 외교적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실무진에서 마련한 일정과 답변의 범위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일본 총리가 아무런준비없이 외국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은 일본 관료로서는 상상조차하기 어려운 일이다. 총리가 미묘한 문제에 대해 잘못 발언해서 일본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이 사건은 미국과 일본의 정책결정방식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였다. 미국과 일본의 정책결정 메카니즘의 차이는 흔히 컴퓨터 네트워크의 차이로 비유된다. 미국의 경우 메인프레임 시스템으로 일컬어진다. 중앙에 초대형 호스트 컴퓨터가 있고 하부에는단말기만 있는 폐쇄형이다. 중앙에서 조정과 제어를 모두 담당하며단말기에선 독립적인 작업을 하지 못한다. 정책결정 과정에서 상급관료는 호스트 컴퓨터고 하급관료는 단말기에 해당된다. 중요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이 위에서 이뤄지고 밑에서는 전달되는 결과만을처리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정책, 하부서 뼈대 결정…상부는 최종 확정일본은 전혀 다르다. 상부에 소형 컴퓨터가 있으며 하부에도 이와비슷한 컴퓨터가 있는 클라이언트 서버 시스템이다. 하부에 있는컴퓨터는 특정 호스트 컴퓨터에 종속되지 않는 개방형이다. 주요정책이 하부에서 입안되고 뼈대가 결정되면 상부와 협의해 최종 확정하는 체제다. 일본의 주요 정책의 3분의 2 가량이 밑에서 「품의계」를 만드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미국이 상의하달이라면 일본은 하의상달인 셈이다. 정책결정 방식상 미국 대통령은 결정권을직접 갖고 있으나 일본 총리는 독자성이 떨어지는 점이 감안되지않은 미·일정상 단독회동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모든 정책결정이 구성원들의 합의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 상하가 대립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공동체의식도 강하다. 반면미국은 의견을 수렴하는 단계가 적어 이질감이 있게 된다. 일본의경우 창의성보다는 조정의 역할이 강조된다. 관련업계에서 나쁜 평을 받는 관료는 국장이 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권한이 하부에 이양돼 직급에 따라 권한을 배분하나미국은 권한이 중앙에 집중된다.일본의 정책결정은 이해당사자들이 사전에 의견을 조율하는단계(네마와시)를 거친다. 공식회의에서는 결정만 한다. 이는 결재방식의 차이도 초래한다. 한국은 정책을 결정할 때 담당과장이 장관에게 직접 보고하고 결재를 받는다. 일본은 이와 다르다. 장관에게 결재를 전담하는 문서과장이 있다. 문서과장은 각국장이 결재한서류를 장관에게 갖고가 결재를 대신 맡아준다. 관련 국실의 이견은 사전 조율단계에서 모두 해소됐기 때문에 국과장이 직접 결재를받을 필요가 없어서다.이런 차원에서 일본은 장관(대신)의 역할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대신중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밑에서 사전에 조율된 결과에 따라 「사인하고 악수하는」일만 하면 된다. 장관이 「단기필마」로 협상도 하고 사인도 해야하는 한국이나 미국과는 사뭇 다르다.미국과 일본의 정책결정 방식은 행정부와 입법부의 역할에서도 차이가 난다. 미국은 의원 입법이 많다. 글래스-스티컬법(우리나라은행법의 일종)이나 케파트법(보호주의무역법) 등 제안자 이름을딴 법이 많은 것은 이같은 관행의 결과다. 반면 일본은 행정부가정책(법안)을 만들면 국회는 이를 확정하는데 불과하다. 입법과정에서 일정한 수정작업을 할 수 있으나 처음부터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 무역마찰이 자주일어나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같은 정책결정방식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미국이 통상마찰 해소를 위해 일본의규제완화를 주장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모든 정책을 「행정지도」가 아닌 법률에 의해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