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먼 옛날 삼국시대 때 일본에 문화와 기술을 전파한 선진국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앞선 자의 지위로 일본땅에 당당히 진격해 들어가지 못했다.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는 말이다.무력이 지배했던 과거 역사동안은 물론 산업경쟁시대인 최근에도그렇다. 일본 시장을 뚫고 들어가 성공한 한국 기업을 찾아보기가힘들다. 진로소주의 일본 대공략이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지난해 진로소주는 매출액순으로 일본내 86개 희석식 소주 제조업체 중에서 5위를 차지했다. 94년 6위보다 한단계 뛰어올라 5대 소주업체로 부상한 것이다. 진로는 일본에서 소주만 1백75만케이스(7백㎖×12병)를 판매, 2천7백만달러의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초기 고전 딛고 84년부터 부상업체순을 떠나 소주 단일 브랜드로만 따지면 진로소주 판매량은 일본의 「준」「레전드」「트라이앵글」에 이어 4위로 뛰어오른다.우리 고유의 브랜드로 일본 시장에서 이만한 성과를 거둔 기업은어떤 업종을 막론하고 진로가 거의 유일무이하다.진로의 일본 현지법인인 진로재팬에 일본 여러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것도 진로와 같은 성공사례가 우리나라 기업은 물론 선진국 기업에서도 드물기 때문이다. 일본이 얼마나 치열하고 공략하기 어려운 시장인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로 「일본에서 성공하면 세계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진로는 어떤 무기로 일본을 공격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진로가 일본에 진출하기로 결심한 때는 77년. 이후 2년간 진로는일본 취향에 맞게 소주를 개량한다. 소주를 물이나 녹차 등에 섞어마시는 일본인 습성에 맞게 당도를 낮추고 디자인과 로고도 일본시장용으로 고급스럽게 새로 개발했다. 진로소주는 79년 일본 수출용으로 따로 만든 진로소주를 들고 일본에입성한다. 일본에 당당하게상륙하긴 했지만 83년까지 4년간의 판매실적은 매년 4천케이스(4만8천병)를 넘지 못했다. 일본에 수출된 진로소주는 물류창고에서 먼지에 덮이기 일쑤였다.초기에 고전하던 진로는 84년부터 상승하기 시작한다. 84년에 판매량 10만 케이스를 돌파한 것. 84년의 급비상은 진로의 판매확대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당시 일본에 불었던 소주 붐에 편승해 얻은 성과였다. 그러나 이때가 진로에는 첫 번째기회였다. 소주의 맛이 일본인 입에 맞았던 덕분인지 84년을 기점으로 진로소주 판매는 제 궤도에 오른다. 진로 본사는 일본 시장을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86년 도쿄에 사무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사무소 개설 업무를 실질적으로 진두지휘했던 사람이현재의 김태훈지사장. 오늘날 진로소주의 신화를 만든 인물이다.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진로소주는 2차 도약기를 맞는다.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틈을 타 판매량 20만 케이스를 넘어섰다.진로는 판매량 증가에 힘입어 도쿄사무소를 진로재팬이라는 현지법인으로 전환한다. 진로재팬의 세번째 도약기는 91년. 전년에 비해판매량이 53.6% 늘어났고 이때부터 소주 판매량이 매년 거의 수직상승선을 그리며 급증하기 시작했다. 92년에는 54만케이스를 판매,전년에 비해 32% 성장했으며 93년에는 45%의 신장률을 보이며8백70만병을 팔았다. 93년 진로소주는 드디어 희석식 소주 시장에서 점유율 2.1%로 전체 소주회사중 8위에 오른다. 진로재팬은 94년에는 61.4%, 지난해에는 54.9% 성장, 전반적으로 침체된 일본 시장속에서도 불황을 타지않고 승승장구해 왔다.진로가 일본시장에 진출한지 16년만에 일본 주류시장에서 확고하게자리를 잡고 5대 소주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여러가지로 분석될 수 있지만 요약하면 단 한 가지다. 품질과 유통 마케팅 세가지 측면에서 철저히 일본에 현지화했기 때문이다. 진로가품질과 유통 마케팅에서 일본을 어떻게 파고 들었고 현지화했는지분야별로 짚어보자.◆ 품질히트상품을 만드는 비결은 간단하다.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만 하면 된다.진로소주도 예외는 아니다. 진로가 소주를 일본에 처음 수출할 때일본인 취향에 맞게 일본 수출용 소주를 따로 개발했던 것도 일본소비자가 찾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일본 애주가들은 단맛이 나는 소주를 싫어하기 때문에 진로는 일본수출용 소주의 당도를 크게 낮췄다. 일본에서 판매되는 진로소주의당도는 국내 시판용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소주를 마시는 습성도한국과 일본이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스트레이트로 마시나 일본에서는 다른 음료와 섞어 칵테일을 해서 마신다. 진로소주는 일본주류업계도 인정할 정도로 맛이 순수해 칵테일하기에 적당한 소주로 정평이 나있다.진로소주는 맛에서 뿐만이 아니라 용기와 로고 라벨 디자인에서도소주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감각을 시도했다. 투명한 초록색병에 빨간색의 「JINRO」가 새겨진 노란색 라벨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진로소주는 고품질 전략으로 일본 소비자의입맛에 파고들 수 있었다. 일본내 주류평론가들은 『진로는 소주라는 주종을 떠나 「진로는 진로」라는 독자적인 장르를 형성하고 있다』고까지 평가한다.94년말 일본의 석간 후지신문이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도 진로소주가 독자적인 시장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조사결과 전체 응답자의 50%만이 진로소주를 소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한국제로 인식하고 있는 비율은 이보다 낮아 30%에 불과했다.일본내에서 고급주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힌 것이다.◆ 유통일본에 진출하는 외국기업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일본시장의복잡한 유통구조와 유통업자의 배타성이다.일본의 유통과정에는 도매상과 소매상이 유난히 많이 참여하고 있다. 외국기업에 대한 일본 유통업자의 배타성도 유명하다. 일본 도매상들은 외국제품의 품질과 가격이 아무리 좋아도 선뜻 취급하려하지 않는다.일본 국내 제조업체와 오랜 기간 거래하며 맺어진 돈독한 신뢰관계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도매상끼리도 그룹이 형성돼 외국 기업을인정하기 위해서는 도매상 그룹 내에서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일단 일본 제조업체와 도매상 또 도매상끼리의 끈끈한 관계를 헤집고 들어가기만 하면 장사하기가 수월하지만 끼여드는 것자체가 워낙 어렵다.진로는 이런 복잡한 일본 유통구조에 한 발을 집어넣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진로가 일본의 유통망을 뚫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오랫동안 도매상과 신뢰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진로가 처음 일본에 진출할 때 인연을 맺은 회사는 도쿄 인근 이바라기현의 가시마주류도매회사라는 지방 도매상이다. 진로는 아직도이 회사와 거래를 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90년이후 급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진로와 판매계약을 맺으려는 도매상의 문의가 잇따랐지만 진로재팬은 가시마와의 거래를 끊지 않았다. 가시마와 관계를 끊고 다른 대형 도매상과 거래를 하면 단기적으로는판매량이 늘어날지 몰라도 일본에서 오래 장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장기간 계약하면서 일본 유통상에게 신뢰감을심어주는게 일본 시장에서는 중요하다.중간 도매상과의 신뢰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진로재팬의 소주판매량 성장률에서도 드러난다.진로재팬은 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급성장의 기틀을 마련했지만89년부터는 오히려 판매량이 정체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침체는90년까지 계속된다. 88년 진로가 일본에서 주류판매면허를 획득한것이 대리점에 불안감을 준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끊을지 모른다고 판단, 소주 판매에 협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로재팬의 김태훈지사장은 중간상에게 신뢰감을 심어줄 수 없으면 침체상태를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 91년 중간상과의 신년간담회 자리에서 자신이 2000년까지 일본에 머무르며 대리점과의 신뢰관계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진로가 탄탄한 유통경로를 구축할 수 있었던 또다른 배경은 중간상에게 충분한 이윤을 보장해준데 있다. 중간상의 이윤을 보장하기위해 진로재팬은 소비자가격을 먼저 정한 다음 소매점과 특약점 도매상 순으로 가격을 결정했다. 진로가 중간상의 이윤폭을 크게 보장할 수 있는 이유는 진로소주의 소매가격이 일본 소주시장에서 가장 비싸 중간마진을 빼고도 진로재팬에 이익이 남기 때문이다.일본소주 중에서 가장 비싼 다카라 소주의 소매가격이 6백81엔인데비해 진로소주는 7백96엔이다. 트라이앵글과 이이치코도 각각6백81엔과 5백68엔으로 진로소주보다 낮다. (7백㎖ 한병 기준)마케팅일반적으로 국내 기업들은 미국이나 EU 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 진출할 때 저가격 정책을 사용한다. 품질이 선진국에 비해 크게 뛰어나지 않는한 가격으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시장에서 일단 저급품으로 인식된 제품은 품질이 아무리 향상되어도 중급품이나 고급품으로 전환되기가 어렵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엄청난 광고비와 마케팅 노력, 시간이 필요하다.◆ ‘최고 품질 최고 가격’ 고수 고급품 인식심어진로는 이런 점을 고려해 처음부터 「최고 품질에 최고 가격」을고수하기로 했다. 진로가 과감하게 일본 소주보다도 비싼 가격을채택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소비자들이 품질에는 까다로운 반면가격에는 덜 민감하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했기 때문이다.고가격 정책 외에 진로의 성공적인 전략은 현지 지사장과 일본 현지인에 대한 대폭적인 권한 위임을 들 수 있다. 진로는 김지사장에게 진로재팬에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줌으로써 김지사장이 장기적인 시야를 갖고 사업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일본시장은 일본인에게 맡기겠다는 현지화 지향 전략도 진로재팬에근무하는 일본인의 의욕을 북돋우고 있다. 월급면에서도 주재원과현지인 간의 차별을 없앴으며 승진에서도 차등을 두지 않고 있다.능력만 있으면 현지인도 사장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에는 처음으로 일본인이 과장으로 승진, 인사에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입증했다.진로재팬은 지금까지 다져온 기반을 바탕으로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우선 유통경로를 확대할 방침이다. 진로소주는 90%이상이 도쿄를 중심으로한 관동지역에서 팔리고 있다. 오사카를 중심으로한 관서지역의 판매량은 미미한 실정이다.진로재팬은 올해부터 관서지역 공략을 본격화한다. 관서지역에 탄탄한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일본주류판매주식회사와 새로 계약을체결, 2월부터 관서지역 판매를 늘린다. 앞으로는 일본 동북지역과큐슈지역 판매도 늘려 진로소주 붐을 일본 전역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또 기존 진로소주 유통망을 활용, 카스맥주도 조기에 정착시킬계획이다.일본에서 흘려온 16년간의 땀을 토대로 진로재팬이 21세기에 어떤모습으로 비상할지 관심이 쏠리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