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곰」 「백할머니」…. 우리 증시의 초창기를 풍미해온 인물들이다. 이름하여 「큰손」. 시장규모에 비한 자금력으로 치면퀀텀펀드로 유명한 세계적인 거장 조지 소로스를 연상시키기에 손색이 없는 인물들이다.거액의 자금으로 주가를 출렁거리게도 만들었지만 우리 증권시장에서 이들 큰손이 갖는 의미는 실로 크다. 국내에 기관투자가들이 뿌리를 내리기 전이었던 시절 이들은 증권시장의 막강한 주역이자 실세역할을 다해 왔다. 더러는 엄청난 자금력에도 불구하고 무리한투자보다는 철저한 정석투자를 고집해 일반개인은 물론 기관투자가들의 귀감이 되기도 한다.이제 우리 시장도 지난 56년 대한증권거래소가 문을 연지 40주년을맞았다. 그동안의 다양한 증시체질 변화는 역시 당대의 국내 증권시장을 이끌어온 큰손들의 변모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과거 70,80년대를 주름잡은 이들중에는 「라이터 박」이나 「헨리 정」을비롯해 큰손들이 많지만 역시 광화문곰과 백할머니가 양대 산맥을이룬다.고성일씨(73).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그는 45년 광복직후 월남해남대문시장에서 수입염료 장사로 떼돈을 벌었고 부동산에도 손을대 엄청난 돈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78년 당시로서는천문학적인 1백억원을 들고 본격적으로 증시에 뛰어들었다. 고씨는증시입문시절 주식시장지를 펼쳐놓고 한페이지 전부를 매입하는 등의 「물량떼기」를 주특기로 삼았다. 「광화문곰」이라는 별명도그의 이같은 우직함에서 비롯된 것이다.당시는 중동건설붐이 한창일 때여서 그도 건설주에 손을 댔으며80년초엔 공영토건 경남기업 진흥기업 등의 건설주를 5백만주씩 사들여 특유의 자금력을 과시하기도 했다.하루 현금동원능력이 수백억원대에 달했던 그도 89년 4월을 고비로내리막길을 달리는 침체증시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급기야 지난91년의 수서사건 직후 한보철강의 주가폭락을 틈타 불법적인 시세조종으로 대규모차익을 거둬 일반인으로선 처음으로 검찰에 고발당했다. 92년엔 상호신용금고를 통해 거액의 자금을 불법대출받은 사실이 적발되기도 했다. 그래서 증권가에선 「신사답지 못한 큰손」으로 불리기도 했다.◆ 백할머니 ‘하얀손’ 정석투자로 떼돈그럼에도 그는 의리파로 통한다. 정계실력파의 돈을 대신 맡아 이익이 나면 돌려주고 손해가 나더라도 자신이 감수하곤 했다는 것.증권투자 초기엔 신용거래로 거래증권사가 자금난에 시달릴 때면땅을 팔아 돈을 갚아주기도 했다는 후문이다.한국증시에서 「여장부」로 통했던 백희엽 여사. 「백할머니」라는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증권가의 큰손이다. 평양 대지주의 장녀로태어난 백씨는 6·25때 양말장사와 페니실린 장사로 거액을 벌었다. 백씨가 큰손으로 데뷔한 것은 이 자금으로 50년대 후반 건국채권이 액면의 20%에 거래되고 있을 때 싼값에 대량으로 사들여 만기상환으로 떼돈을 벌면서부터.6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백할머니라는 이름으로 증권가에 군림해 왔으며 특히 75년의 중동붐을 타고 건설주가 폭등세를 타면서증권가에 명성을 드날렸다. 단순히 백씨가 어떤 종목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만 나와도 해당주식이 폭등할 정도였다.그래도 여느 큰손과는 달리 투기가 아닌 정석투자에 충실한 「하얀손」이었다. 한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사들인 주식은 10년이넘더라도 팔지 않고 장기보유하는 스타일이었다. 「좋은 주식을 골라 재산처럼 간직」하고 충분한 분석을 통해 과학적인 투자에 나선다는게 그녀의 투자철학이라면 철학이었다. 일제시대 대학교육을받은 인텔리인데다 70세가 넘은 고령인데도 영문주간지인 <타임 designtimesp=20656>을탐독할 만큼의 뛰어난 지성이 이같은 철학의 바탕이기도 했다.국내 증권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백할머니는 작년 5월 향년 8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녀의 타계는 단순히 증권계의 큰 별이 떨어진데 그치지 않고 「큰손」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고요한 신호탄이었다. 증권시장의 주역이 탁월한 자금력을 갖춘 개인에서 첨단이론으로 무장한 은행 투신 보험 증시안정기금 등의 기관투자가들로 옮겨가는 「큰손」의 세대교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한경Business designtimesp=20659>의설문결과에서 「큰손」의 개념이 달라져 증시체질 변화를 가져왔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어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사실 80년대 후반의 대세상승장만 해도 「3저호황」이라는 경제여건속에 큰손을 둘러싼 일반투자자들의 개미군단이 가세한 결과였다. 이어 파티는 끝나고 거품이 꺼지면서 90년말의 이른바 「깡통계좌」 정리 때도 희생은 일반인들의 몫이었다. 개미군단들이 이처럼 한차례 홍역을 앓고 난 자리에 자연히 기관투자가들이 들어선것도 큰손이 바뀌는 한 계기가 되었다.새로운 큰손으로 등단한 기관들. 고객자금을 맡아 대신 투자해주는투신사는 말할 것도 없다. 은행들은 지난 92년의 대세하락의 바닥을 확인한 뒤 93년부터 왕성한 식욕을 과시하기 시작했고 94년부터는 보험사들도 뒤질세라 과감히 주식매수에 나섰다. 시중 실세금리하락도 기관들의 자금운용의 물꼬를 채권에서 주식쪽으로 돌리게한 큰 요인이었다.기관투자가들의 엄청난 「파워」는 94년말의 국내 주식시장을 장식했던 부광약품 주식에 대한 기관들의 사상 유례없는 「작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장기신용은행 중소기업은행 고려씨엠생명보험 등 기관의 펀드매니저가 끼인 당시 시세조종에선 1만8천원짜리 주식을 80일만인 95년초엔 12만8천원까지 7배나 튀겨올렸던 것이다. 결과는 국내 불공정거래와 관련해 사상 처음으로 기관 펀드매니저들이 구속되는 사태를 낳고 막을 내렸다.기관들이 큰손으로 부상한 것은 주식소유 비중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지난 80년과 90년만 해도 고작 5.9%와 6.2%에 불과했던 은행권의 주식소유 비중이 93년엔 11.5%로 10%를 웃돌게 됐다.투신권의 소유비중도 7%를 넘나들고 보험사들도 6% 수준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80년대 초반엔 60%를 웃돌았고 90년에도 51.6%를 차지했던 일반개인의 비중은 94년말엔 40.1%로 뚝 떨어졌고 95년말엔30%대로 추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92년 주식시장 개방을 계기로 외국인자금도 물밀듯이 들어와 94년말엔 9.1%를 차지했고 작년말엔 10.0%(금액기준 11.85%)를 차지하고 있다.★ 개방증시의 다크호스는?일반인 팔고 외국인 샀다92년 우리증시가 외국인들에게 개방된 이후 나타난 한가지 특징은일반인들은 팔고 외국인들은 샀다는 점이다. 증시개방 4년간을 결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단순히 사고판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일반개인이 판 만큼 외국인투자자들이 사들인 것으로 나타나 더욱 눈길을 끈다. 물론 외국인들은 내재가치 우량주를 공략해 우리네 개미군단이 처분한 주식을 그대로 사들였을리는 만무하지만 금액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작년말까지 일반인들은 한해도 빠짐없이 순매도 행진을 벌여 4년동안 모두 8조8천4백82억원어치를 내다 팔았다. 반면 외국인들은92년부터 4년간 8조9백92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첨단 투자이론으로 중무장한 외국인들의 투자패턴 앞에선 92년8월 이후의 상승장에서도 일반인들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분석이다. 특히 일반인들이많이 보유한 대중주의 대표주자인 은행주들의 주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오른게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국내 투자자들의 온갖 관심을 모았던 외국인투자자들의 위력은 대단했다. 92년엔 영국계 자금을 중심으로 수익성에 비해 주가가 저평가된 저PER(주가수익비율)주들을 집중적으로 사들여 우리시장에이른바 「저PER혁명」을 가져오기도 했다. 외국인들이 무슨 종목을산다더라 하는 루머가 시장의 가장 큰 재료가 된 것은 물론이다.93년엔 미국계 자금이 후발주자로 들어와 한도가 차지 않은 종목을중심으로 「싹쓸이」를 했다. 93년 하반기에는 한전주를 한도껏 사들여 같은해 6월말에 1만7천3백원에 그쳤던 이 종목의 주가를 12월18일엔 2만6천원까지 끌어올렸던 것도 바로 미국계 자금이었다. 한전은 시가총액이 가장큰 종목이어서 그만큼 주가움직임이 무딘데도자금력으로 주가를 끌어올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94년12월과작년7월의 단계적인 한도확대와 함께 외국인 투자자금의 유입속도는 가속화됐다. 작년말 현재 국내 주식투자를 위해 들어온 외국인자금은 모두 1백20억4천만달러. 올해도 외국인한도가 추가확대될예정이어서 이들 자금의 향배가 주목받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