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해도 「맥주는 OB」라는 말이 있었다. 맥주를 마신다고하면 OB를 마시는 것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술집에 가서 굳이크라운을 고집하지 않는한 「맥주 주세요」하면 당연히 OB맥주가나왔다. 그러나 요즘 웬만큼 술을 즐긴다는 사람치고 술집에 가서「맥주 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OB라거 주세요」「하이트 주세요」「카스 주세요」가 일반화됐다. 자기가 마시는 브랜드가 확실하다. 최근 2∼3년간 맥주업계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현실이다.맥주하면 자기의 기호에 관계없이 OB를 떠올리던 무풍지대 맥주시장에 마케팅 개념을 처음 시도한 상품이 하이트맥주다. 하이트가나오기 전까지 맥주업계에서는 마케팅이 필요없었다. 주류도매상을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차피 OB 아니면 크라운이었다. 광고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좋다. 맥주가 좋다」는 식의분위기 광고가 대부분이었다. 무엇 무엇 때문에 어떤 맥주가 좋다는 얘기는 통하지 않았다. 소비자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하이트맥주는 처음으로 이성적인 방법으로 소비자에게 접근했다.「맥주의 90%는 물. 150m 천연암반수로 만든 맥주 하이트」가 그것이다.그러나 93년 하이트맥주가 나왔을 당시에 소비자들이 그토록 열광하며 하이트에 지지를 보냈던 것은 단순히 물이 좋았기 때문은 아니다. 반세기 이상 변함없는 OB와 크라운에 식상했기에 「OB말고다른 맥주도 있구나」하는 심정으로 하이트를 선택했던 소비자들도많았다. 하이트맥주가 조선맥주의 열악한 유통망으로도 대히트를칠 수 있었던 것도 소비자가 찾는 제품이었기 때문이다.맥주시장의 소비자시대를 연 하이트맥주는 주류 유통시장에도 중요한 변화를 몰고 왔다. 하이트 이전까지는 맥주를 팔기 위해서 일단도매상을 잡아야 했다. 지금은 맥주판매량중 가정용과 업소용의 비율이 대략 7:3정도로 가정에 팔리는 양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업소 비율이 높았다. 당연히 업소에 술을 대주는 도매상에 잘 보여야 했다.또 주류도매업에 대한 면허를 따기가 힘들어 도매상 자체가 적었기때문에 도매상을 대상으로한 영업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90년에들어서야 주류도매업에 대한 면허가 개방, 도매상도 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됐다.◆ 진로 쿠어스 출시로 맥주도 브랜드시대 돌입진로쿠어스맥주의 송형섭차장은 『90년까지 77개였던 수도권 지역도매상이 면허가 허가된 90년 이후부터는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6년사이 3백개로 급증했다』고 밝힌다. 주류도매업 면허 개방과 하이트맥주의 성공이 「도매상 잡기」에서 「소비자 마음 끌기」로 맥주업계의 경쟁 양상 자체를 변화시킨 셈이다.맥주시장이 소비자의 존재에 대해 눈뜨기 시작할 무렵인 94년 5월,드디어 제 3의 맥주가 나타난다. 몇십년간 회사라곤 OB와 조선밖에없던 맥주시장에 다크호스로 등장한 장본인은 진로쿠어스. 진로쿠어스맥주가 카스맥주를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맥주시장은 본격적인「My Brand(나만의 브랜드)」시대로 접어들었다. 「맥주 주세요」가 아니라 「무슨 무슨 맥주 주세요」가 된 것이다.「강호의 맹주」로 맥주시장을 지배해왔던 OB가 앉아서 맥주시장을빼앗길 리는 없다. OB의 첫 번째 포문은 94년 3월에 열렸다. 비장의 무기는 아이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 마케팅 전문가들은아이스의 실패원인을 두가지로 분석한다.첫째는 제품의 특징이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빙점이하의 맛」이라는 컨셉에 소비자들은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둘째는제품 시판 시기를 잘못 잡았다.『신제품을 시장에 안착시키려면 시판 초기에 최소한 월30만∼40만㎘씩은 팔아야 한다』(조선맥주 김명현부사장).때문에 맥주 신제품은 본격적인 맥주철이 시작되는 초여름에 선보이는게 일반적이다. 하이트맥주와 카스맥주가 모두 5월말에 시장에첫 선을 보인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그러나 아이스맥주는 3월3일부터 판매됐다. 우리나라의 3월은 아직추운 때다. 게다가 아직 추위가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아이스맥주는 「빙점이하의 맛」을 내세웠다. 시장에 일찍 내놓고 싶었으면아예 하이트맥주가 한창 뜨기 시작하던 93년 말에 시판, 하이트 붐을 가라앉히기라도 했어야 했다. 아이스는 결국 제품 자체로도 성공하지 못했고 하이트 돌풍을 잠재우는 역할도 못했다. 94년말 아이스맥주는 시장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OB의 다음 무기는 다브랜드전략. 다브랜드전략이란 각기 다른 소비자의 기호에 맞춰 다양한 제품을 내놓는 마케팅 기법이다. OB는94년말 넥스에 이어 95년 카프리와 OB라거맥주를 연이어 내놓았다.시장을 잘게 쪼개 경쟁제품이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고 틈새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의도였다.그러나 전문가들은 OB의 다브랜드전략에 의문을 보내고 있다. 서강대 경영학과의 하영원교수는 이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몇가지조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한다.『다브랜드가 성공하려면 각각의 브랜드가 분명히 차별화된 특성을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사 브랜드끼리 시장을 잠식하면서 어떤 브랜드도 주력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졸장으로 전락해 버릴 위험성이 크죠.』현재 OB에는 하이트에 맞설 간판 브랜드가 없다는 지적이다. OB라거나 넥스나 맥주시장의 패왕이었던 옛날 OB레귤러 맥주의 시장을잠식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OB맥주가 본격적인 다브랜드전략을펼쳤던 지난해의 판매량은 전년보다 오히려 17.8%가 줄어들었다. OB맥주도 다브랜드전략의 약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계속 고수하겠다는 입장이다. 경쟁사인 조선맥주나 진로쿠어스맥주가 쉽게 다브랜드전략을 따라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다브랜드전략은 신제품 개발비와 개별 제품의 광고비 및 판촉비 등으로 엄청난 자금력을 필요로 한다. 별다른 계열사가 없는 조선이나 맥주시장 진출 초기의 투자비용만으로도 힘겨운 진로가 쉽사리수행할 수 없는 마케팅전략이다.김명현 조선맥주 부사장이나 이황원 카스맥주 사장도 『지금 상황에서 다브랜드전략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부정적인반응을 보이고 있다. OB가 다브랜드전략에 기대를 거는 또다른 이유는 맥주시장 자체가 이미 세분화하고 있다는 자체 분석때문이다.『30대와 20대, 여대생과 직장 여성, 압구정동 신세대와 을지로의샐러리맨 등이 마시는 맥주가 모두 다르다. 어떤 성향의 소비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브랜드로 공략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OB맥주 여도석대리).◆ 3사, 시너지 효과 낼 신제품개발에 주력조선맥주에도 고민은 있다. 하이트맥주가 나온지 3년이 되면서 초기의 추진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 처음의 공격력을 되살리기 위해 제품컨셉을 「좋은 물」에서 「대표맥주」로 바꿨지만 어느 정도 주효할지는 미지수다.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상 하이트는 이미완숙기에 접어들었다』(OB맥주 황선양과장)는게 주위의 평이다. 하교수도 『하이트의 후속타가 나오는 시기가 너무 늦어지고 있다』며 『「대표맥주」라는 마케팅 전략도 장기적으로 설득력을 가지지는 못할 것이고 결국 신제품이 나와 줘야 한다』고 지적한다.진로쿠어스맥주는 카스맥주의 특징을 「100% 비열처리」로 계속 유지해 나갈 계획이다. 카스맥주의 광고를 담당하고 있는 LG애드의이재헌부국장은 『광고 마케팅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품의아이덴티티(정체성)를 확보하는 일』이라며 『비열처리라는 컨셉이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만큼 일관되게 밀어붙일 계획』이라고 말했다.그러나 하교수는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비열처리가 소비자들이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개념이라는 지적이다. 차별화에는 성공했지만 점유율을 진로에서 원하는 만큼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설명이다. 진로의 해법도 결국 카스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수있는 신제품을 시의적절하게 내놓는 것 뿐이라는 얘기가 된다.결국 올해 맥주경쟁은 94년을 기점으로 가열되기 시작했던 광고전이 수그러들면서 신제품 싸움으로 서서히 바뀔 가능성이 크다. 어느 업체가 먼저 산뜻한 신상품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느냐에맥주업계의 패권이 달려있는 셈이다. 소비자들은 기존에 나와 있는맥주와 분명히 차별화되는 특징과 표적층을 가진 제품을 기다리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