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의 퇴진은 전문 경영인을 비롯한 임원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예외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기업 소유주가 아닌바에야 급여를받고 승진하고 때 되면 물러나는 예정된 코스앞에서는 「별」이라는 높은 직급이 아무런 방패막이가 되지 못한다.지난 95년은 그런 점에서 「위대한 퇴장의 시기」라 불릴만했다.60년대와 70년대 한국 경제를 일선에서 끌어온 재계의 간판급 스타들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현대 LG 쌍용 코오롱 한보 금호 등 주요 그룹의 경영권이 2세나3세 또는 「2.5세」(형제)로 승계(일부는 96년) 됐고 그에 따라 임원진 전체에도 연쇄적으로 젊어지는 바람이 불어닥쳤다.한 세대를 풍미했던 전문 경영인들이 새로운 지휘자를 맞아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그 자리를 40대를 중심으로한 신진기예들이 메웠다.마치 검찰 조직에서 아래 기수가 총장에 올랐을 때 선배들이 일제히 사표를 제출함으로써 후배 총장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것과흡사했다.물러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개발 연대를 달려온 샐러리맨들이라면 한번쯤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을 법한 인사들이다. 삼성의 경주현 종합화학 회장(57), 현대의 이춘림 종합상사 회장(67), LG의이헌조 전자 회장(64), 대우의 이경훈 비서실 회장(61) 등…. 모두창업멤버거나 아니면 그룹 초창기 기업 성장에 절대 공훈을 세운전문 경영인들이다.◆ 창사이래 최대…“젊은 회장 입지 강화 차원”도95년의 인사에서는 이들 회장 사장급 외에도 상당수의 임원이 신변을 정리해야만 했다. 2선으로 물러난 임원수는 삼성이 60여명,LG가 30여명에 달하고 그밖에 10위권 이하의 그룹도 고문 자문역상담역 등의 형식을 통해 10~20명씩 퇴진시켰다. 당시의 인사는 규모도 규모려니와 대표이사로 발탁된 임원의 연륜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까닭에 갖가지 화제를 낳기도 했다. 실제삼성이나 현대 대우 쌍용 등 대부분의 기업들이 모두 「창사 이래최대」라는 수식어가 붙은 인사조치를 단행했다.또 일부에서는 세대교체라는 표현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는지 요즘 유행하는 「○○ 파괴」시리즈에서 빌려와 「직급파괴」 「연령파괴」로 평가하기도했다. 한마디로 재계 전반에 걸쳐 물갈이의 도미노 현상이 일었던 것이다.이번 세대교체 인사는 사실 어느 정도 예상된 수순이기는 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1~2년전부터 나이든 임원은 해외로 배치하고국내는 전부 젊은 세대로 바꾸겠다는 방침을 밝혀왔다. 현대는 연말 인사에 앞서 그룹내 소장층으로 분류되는 박세용 종합상사 사장을 그룹 종합기획실장에 겸임 발령함으로써 대규모의 세대교체를시사했고 삼성 역시 경주현 기계소그룹장을 전격 교체하면서 다음수순에 대한 감을 잡게 했다. LG는 5년전 그룹의 노장층이 그룹 발전에 저해가 되고 있다는 컨설팅사의 진단에 따라 이미 한차례 대규모의 인사조치를 취한 바 있어 이번 인사는 사실 「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또 코오롱은 3세 체제로의 전환을 예고해 놓고 있었으므로 이미 초읽기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갈이의 신호탄은 사전에 발사되어 있었다는 얘기다.각 그룹이 이처럼 「장로세대」를 대거 솎아내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순전히 경영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기업 구조를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는 설명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패기있고 국제화 감각이 앞선 층으로의교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마케팅 측면에서도 고객이나 소비자 계층의 연령이 낮아지는 추세에 있으므로 이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경영자와 소비자간 세대간격이 적은게 좋지않겠느냐는주장도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는 젊은 회장의 입지를 강화해준다는 해석이 타당할 것이다. 연장자가 있으면 아무래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만큼 『소신껏 해보라』며 정지작업을 해준다는 차원이다. 아울러 비자금 파문과 관련해 정경유착의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 기업 내부의분위기를 쇄신하는 한편 재계쪽에서도 뭔가 변화가 있어야하지 않느냐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한편 어차피경영권 승계 시점에 와 있는 기업들로서는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빌려 모양새있게 세대교체를 이룬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는 계기도 됐을 것이다.이밖에 정치권의 세대교체에 대한 화답의 제스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신한국당의 40대 강삼재 사무총장으로 대표되는 정치권의 신세대 등장은 재계쪽에 대해서도 「격이 맞는」 카운터파트를 내세우게 했음직하다.특히 4월에 있을 총선이나 내년 대선을 감안할 때 미리 젊은 총수를 내세움으로써 정치권쪽의 신진세력 연배와 잘 어울리도록 한다는 복안도 작용했을 것이다.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재계의 인사에 대해 집권당측과 사전에 교감을 가졌을 것이라는 관측도 하고 있다. 마치 약속이나 한듯 재벌그룹들이 거의 동시에 노령층을 뒤로 물렸고 몇몇 경영진의 경우「다소 이르다」 싶을 정도의 조기 퇴진을 했다는 점 등이 이러한관측을 뒷받침하는 요소들이다.더구나 2세들을 경영 일선에 내세운 그룹들의 경우에는 명분이라도서지만 삼성이나 대우처럼 오너가 바뀌지 않는 그룹에서도 대규모물갈이 인사를 실시한 것은 다소 아리송한 측면도 없지않다. 이번인사를 두고 액면 그대로의 세대교체로만 보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있다.◆ 신선한 감각·탁월한 기동력 높이 사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천리다. 또한 「변화」라는 한마디가 현 세기말의 주제어가 되다시피한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신선한 감각과 보다 더 탁월한 기동력을 지닌 세대로 진용을 바꾸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하지만 원로 전문 경영인들을 한꺼번에 퇴진시키는 것이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도 없지 않다. 특히 이번 장로세대들의 퇴진이 「기업인 천수(天壽)」에 의거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인 물갈이 성격이 짙은만큼 반드시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의견이다. 기업 경영에는 물론 새로운 수혈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경험과 위기관리 능력도 요구되기 때문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생산성과 실적이 더 급할지모르겠으나 경험칙은 「신구의 조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또 한가지 이번 인사가 상속에 따른 재산 물림의 결과로 나타난 부분이 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전문 경영인의 위상과 역할이제고되고 증대되기는 커녕 오히려 입지만 약화됐다는 분석도 그래서 나온다.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는 인사였다는 비판이다. 일본의혼다사는 가족은 일절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는다. 전문경영인들이회사를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되어있다. 비록 일부분이기는 하지만우리 기업 인사의 전근대성은 오래전부터 지적이 되어온 터다.젊은 나이에 경영인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물론 본인에게는 축하할일임에 틀림없으나 그 이면에는 「빨리 오른만큼 일찍 나가게 되는」 그림자도 안고 있다. 그럴 경우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노장층의 경륜은 구하기 힘들게 될지도 모른다. 세대교체라는추세는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이 틀림없지만 세대간 적절한 균형은 유지되어야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