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온정주의..."능력없으면 나가라" 유행

「삼성 4백34명, 현대 3백85명, LG 3백36명, 대우 3백67명, 선경89명, 쌍용 1백2명, 한진 76명, 기아 95명, 한화 94명, 롯데 45명」.작년말과 올해초에 걸쳐 이루어진 국내 10대 그룹들의 정기인사때승진한 임원들의 수다. 비자금사건으로 많은 총수들이 검찰에 소환되는 홍역을 치른 대그룹들은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대부분 대대적인 승진인사를 단행했다.이중 한국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는 현대 삼성 LG 대우 쌍용등 국내최정상그룹들은 창사이래 최대규모의 승진인사를 했다. 각언론들은 이번 인사의 특징을 「창업이래 최대승진 발탁인사 전문경영인제도정립 세대교체」로 규정하며 앞다투어 승진임원들의 명단과 사진을 곁들여 크게 보도했다.그러나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대규모의 승진인사 뒤에는퇴진하는 임직원의 수도 크게 늘기 마련이다. 이들 퇴직자들은 언론들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승진자들과는 정반대로 소리없이외롭게 스러져간다.◆ 퇴직임원 예년의 2배에 가까워특히 젊은 총수로의 세대교체와 30, 40대 사장의 대거 발탁은 원로경영인들과 고참관리직간부사원들의 대거 퇴진으로 이어지고 있다.졸지에 퇴직당한 임직원 중에는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다른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한창 일할 시간인 평일 오전 10, 11시경 도봉산과 관악산에 말쑥한얼굴의 중년신사들이 배낭을 메고 산에 오르는 모습이 눈에 띄게늘고 있는 것도 최근 인사태풍에서 밀려난 퇴직자들과 무관하지 않은 풍속도다.대규모의 발탁인사를 통해 30대 이사, 40대 사장이 출현한 기업들에서는 40. 50대 고참부장들이 언제 밀려날지도 모르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절부절 못하는 분위기다.S그룹계열사에 근무했던 P이사. 승진을 내심 기대하고 있던 그는작년 정기인사가 발표되기 직전 돌연 퇴직권고를 받았다. 다른 임원에 비해 나이가 많다며 개별적으로 은밀히 통고받았다. 회사는비상근자문역으로 발령을 내고 자신의 자리를 없애버렸다. 그때부터 집에서 외출을 거의 하지 않은채 3달을 보내고 있다.그는 자신처럼 퇴직한 임원들이 모이는 강남의 사무실에도 나가지않는다. 상근자문역들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사무실을 전직이나 개인사업에 필요한 활동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지만 비상근자문역은그나마 이러한 혜택(?)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처음에는 비상근자문역으로 발령난 자신과는 달리 그들을 상근자문역으로 발령내 철저히 차별받았다는 생각에 치욕감을 느끼기도 했다.신입사원으로 입사, 젊음을 이 그룹에서 전부 보낸 그는 한동안 허탈감과 배반감을 삭이느라 애를 먹었다. 지금도 우울한 마음은 떨칠 수 없지만 자신보다 더 딱한 처지의 다른 그룹 임원들과 비교하며 애써 자위하곤 한다. 자신이 근무했던 그룹은 비상근자문역이란직함으로 1년 동안 기본급여와 일정비율의 상여금을 지급, 전직이나 생계를 지원해주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부분적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P이사처럼 이번 정기인사를 전후로 퇴직한 임원만해도 예년에 비해 월등히 많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30대 부장 11명을 임원으로 발탁한 삼성그룹에서는 임원 65명이 퇴직했다.이는 예년의 2배 가까운 수준이다. 사장급이상만도 경주현 종합화학회장, 김정순 삼성라이온스회장, 남정우 삼성카드사장, 안재학그룹해외사업단장 등이 상담역이란 직함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정몽구 회장체제로 출범한 현대그룹도 이춘림 종합상사회장이 연초에 그룹고문으로 위촉된 것을 비롯, 지주현 엘리베이터회장, 송윤재 대한알루미늄회장 등 창업1세대가 모두 일선에서 물러났다.LG그룹에서는 사장급을 포함해 임원 26명이 물러났다. 이번 정기인사에서 김민희 LG애드사장 김영태 LG-EDS사장 김용선 인화원장 백중영 LG산전사장 등이 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헌조 전자회장도현직이기는 하지만 그의 전문분야인 반도체와 무관한 인화원 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사실상 경영일선에서 손을 뗐다. 대우그룹도 예외는 아니다. 승진이 뒤처져 해외법인이나 신규사업쪽으로 자리를 옮긴 임원들을 제외하더라도 예년과 같은 20여명의임원이 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우중 회장의 창업동지인 이우복인력개발원장이 고등기술연구원장으로 전보됐고 이경훈 비서실회장이 경영일선에서 은퇴했다.쌍용그룹에서는 이번 인사에서 처음으로 전무이하 임원급에도 자문역제도를 신설, 6명을 자문역으로 위촉하는 등 원로임원들이 경영에서 대거 물러났다. 지난 한해동안 중간관리자등 직원 35명이 명예퇴직했다. 대그룹들은 임원들의 대량해고를 원만히 추진하기 위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퇴직임원의 반발과 반감을 누그러뜨릴수 있는 고문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 극히 일부 최고임원들에 베풀었던 일종의 퇴직지원제도를 이사급 임원들에게도 적용하는등 수혜폭을 넓혀가고 있다. 삼성그룹은 상담역(사장급 이상) 경영고문(대표이사 부사장) 자문역(부사장 미만) 등의 퇴직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상담역은 2년,경영고문과 자문역은 1년으로 정해져 있으나 회차에 관계없이 연임도 가능하다고 규정을 바꿨다. 만의 하나 회사가 필요할 때 재임용기회를 갖는 동시에 퇴직에 따른 마음의 준비기간을 주자는 취지다. 또한 자문역은 상근자문역과 비상근자문역으로 보다 세분화하면서 새로운 제도로 정착시켜나가고 있다.◆ 임원은 퇴직준비기간 있으나 간부는 없어삼성은 올해부터 지원규모도 높였다. 상담역 경영고문과 자문역의경우 직전 월급의 80%를 지급했으나 올해부터는 1백%로 상향조정했다. 보너스도 8백50~9백50%를 주고있다.현대그룹도 퇴직한 임원을 대상으로 대표이사급은 상담역, 부사장이하 임원은 자문역으로 위촉하고 있다. 상담역에게는 재직 때 월급의 1백%와 사무실 차량을 지원한다. LG그룹은 고문은 퇴임사장,자문역은 퇴임한 부사장 이하 임원 중에서 각각 위촉한다. 회사에공헌이 컸던 임원들에 한해 사장급은 고문으로, 임원들은 자문위원으로 위촉돼 1~3년 동안 머무르며 퇴직을 준비하도록 지원하고 있다.대우그룹도 현직 사장급 이상은 고문, 부사장 이하 임원은 상담역으로 발령을 내 퇴직에 앞서 전직준비기간을 주고있다. 기간은 1년이 원칙이며 연장도 가능하다. 봉급과 처우는 그 직전 직위 때와똑같다. 대우는 이런 고문과 상담역 제도를 2년전부터 적극 활용하고 있다.쌍용그룹은 올해부터 퇴직한 임원 중 사장급 이상은 고문으로, 전무급 이하는 자문역으로 위촉하는 제도를 새로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다. 고문과 자문역에는 원칙적으로 1년에 한해 재직 때 월급(보너스 제외)이 지급되나 다른 직장을 찾을 경우에는 그때부터 월급지급이 중지된다. 선경그룹은 개인별로 2년간 고문으로 임명, 일정급여를 지급하고 있다. 주력사 사장의 경우 부회장으로 3년, 비상근 고문으로 2년간 근무할 수도 있다. 그래도 임원들은 퇴직할 때일반간부사원들에 비해 우대받는 편이다. 일반간부사원들의 퇴직을지원하는 회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이런 상황에서 전문직우대와 세대교체로 특징되는 이번 인사는 하위직급인 부장 차장 과장 등 중간관리직사원들의 대대적인 퇴직으로 이어질 공산이 높다. 잘나가는 동료직원이 임원으로 발탁되고기술직등 전문직간부들이 빠른 속도로 승진함에 따라 상대적으로나이든 상당수 관리직사원들의 퇴진이 불가필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중간관리직사원들은 신경영의 일환으로 추진하는 명예퇴직으로상당수가 직장을 떠났다. 가장 안정된 직장으로 여겨졌던 금융계와공기업에서도 지난해부터 대대적인 명예퇴직제도를 도입, 인원감축을 단행하고 있다. 여기에다 계급정년제를 도입하는 기업들이 늘고있어 일정기간 승진못하면 강제 퇴사당할 판이다. 그렇다고 임원들처럼 최소한의 퇴직준비지원책도 전무한 실정이다. 예전같으면 회사를 중도 퇴직해도 대리점개설 등 재직때 연고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기업들은 승진자나 보직이동에 따른 인사발령에 대해선 대대적으로홍보하고 있으나 퇴직자들에 대해선 일체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H그룹의 홍보담당자는 『무슨 좋은 일이라고 계열사를 일일이 조사해 전체퇴직자수를 파악하겠느냐』고 반문한 뒤 『개인의 사정에따라 퇴직하는 것이니 회사에서 굳이 이 문제를 공론화할 필요가없다는 생각』이라고 퇴직자 실태파악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이제 회사에 몸담고 있는 화이트칼라들은 승진하거나 승진에서 누락하거나 간에 항상 불안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승진자도 언제퇴직자명단에 오를지 모른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 시기도 예전보다훨씬 앞당겨지고 있다. 화이트칼라들이 수난을 넘어 죽음의 시대를맞고 있다고 말하면 과장된 표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