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이란 말은 허약하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말에 허울좋은 포장을 한 단어가 바로 「잠재력」이다. 국내 패션산업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패션산업이 발전할 잠재력이 많다」라는 말 역시 허약한 것이다. 패션대국이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말도 된다.분명한 것은 국내 패션산업의 「잠재력」을 논할 때 패션산업이란양이 아닌 질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패션시장의 규모라든가 의류수출 물량을 뜻하는게 아니다. 세계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발휘하느냐 하는 질의 개념이다. 옷을 만드는 단순한 제조업 수준에서 유행을 만들어내는 서비스산업으로 패션산업에 대한 인식전환을 전제로 한다.국내 패션산업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한 이유는 국내 섬유산업 전체가 전환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국내 섬유산업은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수출 위주로 운영돼 왔다. 프랑스나 미국 등 선진국의유명 의류가 국내 봉제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의류에 대한 OEM수출이 많았기 때문에 섬유산업은 수출산업으로 장려받아왔고 오늘날한국의 경제를 일으키는데 한몫을 담당할 수 있었다. 패션의 질에대한 고민없이 물건을 만들어내서 양을 채우면 그만이었다.그러나 이제 상황이 변했다. 인건비가 높아지면서 우리나라는 더이상 OEM수출국가로 환영받지 못한다. 오히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의류 수입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해외 유명 브랜드가국내 의류시장을 하루가 다르게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옷을 만드는 기술은 우리도 다른 나라 못지 않다.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문제는 「패션에 대한 노하우」다. 「옷을 만드는 기술」은 있지만 「패션 이미지를 창조하는 문화력」에서 달린다. 축적된 정보나 패션문화가 없다. 남의 하청을 받아 옷을 만드는 「2차산업」은자신있지만 패션문화를 판매하는 「3차산업」에는 경험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 패션산업은 한마디로 제조업과 서비스업 사이에 끼여있는 셈이다. 우리나라 패션산업의 잠재력이 지금 제기되는 이유도그래서다. 잠재력이란 늘 그렇듯 과도기 상태에 사용하는 단어이기때문이다. 국내 패션산업이 다시 2차산업 수준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해결책은 단 한가지다. 3차산업으로 하루빨리 전환하는 것이다. 3차산업으로의 이행은 동시에 패션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의미한다.◆ “경제력·마케팅력이 가장 부족하다” 토로패션산업이 3차산업으로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요건은 「세계화 정보화 문화상품화」다. 세계화란 국내 패션시장과 패션업체를 세계수준으로 격상시킨다는 의미다. 패션은 국경을 초월한다. 한국의패션시장이나 싱가포르나 팔리는 옷은 비슷하다. 패션시장처럼 빠르게 전세계적으로 통일되고 있는 시장도 없다.이제 패션시장을 한 국가에 국한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한 브랜드는 전세계 각 도시에서 동시에 팔린다. 패션대국인 프랑스나 미국 이탈리아의 유명한 브랜드는 전세계 의류시장을 대상으로 한다.패션산업으로 살아남으려면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국내패션시장과 패션업체의 세계화가 필요한 것도 이때문이다.정보화는 패션산업을 3차산업화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다. 앞으로 어떤 스타일과 색이 유행할 것인지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패션산업은불가능하다. 패션상품을 하나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를 내야하고 아이디어에 따라 상품을 기획하고 디자인해야 한다. 아이디어 발상과 기획과 디자인 과정은 정보에 따라 이뤄진다. 정보는 단순한 패션유행 정보에 국한되지 않는다. 패션은 생활이다. 사람들의 윤리관과 라이프스타일 가치관과 함께 간다는 얘기다. 그 사회와 문화에 대한 정보 전체를 포괄한다.문화산업화는 패션의 예술적인 성격을 상품화한다는 뜻이다. 프랑스 정부는 패션산업을 문화산업의 하나로 지정해 지원하고 있다.문화가 패션에 가치를 부여하는 요소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패션산업에서는 많이 팔아서 덩치를 키우는게 절실하지 않다. 한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게 더 중요하다. 차별화된 특징을 가진 세계 유일의 패션상품으로 한 제품에 대한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필요하다.『전통혼례 때 입는 활옷을 탈색시킨 뒤 블루진과 접목시켜 프랑스에서 발표했더니 반응이 좋았다.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라 원하는가격에 판매할 수 있었다. 독창성이 있으니 부가가치가 높아진 것이다.』(진태옥 디자이너) 고유한 문화를 담고 있는 패션은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그림을 종이값과 물감값을 따져 사지 않듯 패션도소재값을 기준으로 가격이 정해지지 않는다. 거기에 들어있는 아이디어와 참신함에 가치를 매기는 것이다.◆ “독창성 있으면 부가가치 높다”문제는 단순한 문화화가 아니라 문화상품화라는 점이다. 고부가가치를 가진 패션문화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상품화시킬 것인가가 관건이다. 패션을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세가지 요소가 갖춰져야 한다.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디자이너의 능력과 시장에 판매할 수 있는 마케팅력, 이 두가지를 뒷받침하는 자본력』(장광효 디자이너)이 그것이다.우리나라 패션산업은 특히 이 부분에서 약하다.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조지오 아르마니는 이탈리아 소재업체의 스폰서 속에서 자신의역량을 키워나갔다. 미국의 도나 카란이라는 디자이너도 일본 소재업체의 지원을 받았다. 『패션강국에서는 패션소재업체가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뛰어난 디자이너를 통해 소재가 발달할수 있기 때문이다.』(김묘환 넬리로디 한국지사장) 국내에서는 디자이너와 기업의 연계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 국내의 일류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이 세계 시장에 나갈 때 가장 부족한 부분은 경제력과 마케팅력이라고 토로한다. 패션문화를 상품화하는데 대한 지원없이는 우리나라가 패션선진국으로 성장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다.물론 왜 패션선진국이 돼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패션산업말고도 미래의 유망산업은 무궁무진하다. 반도체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정보통신도 있는데 왜 하필 패션산업이어야 하느냐는 의구심이 든다. 패션산업이어야 하는 이유는 패션산업이 정보산업이자 문화산업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산업시대를 지나 정보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많은 미래학자들은 정보시대 이후에는 문화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한다.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정보에 정신과아이디어를 불어넣은 문화가 각광받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견이다. 패션은 정보와 문화를 복합한다.패션의 중요성은 화이트칼라의 위치 변동에서도 알 수 있다. 이전의 화이트칼라는 열심히 일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인정받았다. 이제는 다르다. 자신의 전문분야와 개성, 자신만의 생각이 있어야 한다. 국제무대에서도 그렇다. 자기만의 독특함이 없으면 어떤 제품이든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독특함은 개성과 감성에서 나온다. 개성과 감성을 최고의 무기로 내세우는 산업이 문화산업이고문화산업 중에서 가장 쉽게 상품화할 수 있는 분야가 패션이다. 패션은 문화와 상품의 경계선에 위치한다. 소프트웨어의 비중이 극대화되는 정보 문화시대에 패션산업에 대한 노하우 축적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