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경쟁력을 지닌 고부가가치 전략산업」. 반도체나 생물산업또는 우주공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의외로 금융산업을 가리킨다. 재정경제원과 한국금융연구원이 공동으로 내놓은 「21C 금융장기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그동안 실물경제를 지원하기위한 정책수단으로만 「활용」되던 금융산업을 미래 전략산업으로육성하겠다는 뜻이다.이는 현재의 금융산업에 대한 냉철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실물부문에서는 가끔이나마 세계일류가 나오는데 금융은 밑바닥을 헤매고있다. 금융이 지난 30여년간 실물을 위해 「희생」을 강요당했던탓이다. 『개인은 역금리에, 금융기관은 자율성을 펼치지 못하는희생을 치르면서 기업을 지원해 온 결과 막대한 부실채권을 떠안고경쟁력은 땅에 떨어졌다』(정해왕 금융연구원 부원장)는 말이다.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1백80도 바뀌었다. 금융시장이 개방되면 그동안 쌓아온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제조업을 해서 어렵게 벌어들인 돈을 머니게임에서 날려 버리는 상황을배제하기 어렵게 된다. 일본이 욕을 먹으면서까지 미국에 자동차를내다 팔아 번 돈을 채권투자를 잘못해 날려 버린 예(다이와은행)가 이를 말해준다. 금융산업의 자체 발전이 없이는 국부(國富)증진이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는 얘기다.장기구상은 우리나라 금융산업을 한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장기 정책과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오는 2020년까지를 3단계로 나눠 1단계(현재∼2000년)에는 준비작업을 끝내고 2단계(2001∼2010년)에선도약을 한 뒤 3단계에 비전을 달성한다는게 그것이다.이를위해 단순히 각종 금융규제를 점진적으로 완화해 나간다는 소극적 정책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민간부문이 자율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금융혁신과 경쟁력을 배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는적극적 정책패러다임으로 전환한다는 복안도 제시했다. 금융규제를선진국 수준이상으로 완화한다는게 최종 도착점이기도 하다.보다 구체적으로는 2000년까지 선진국 수준의 간접통화관리방식을확립하고 경쟁제한적인 규제를 과감히 철폐, 민간부문의 창의력을높여 자생력을 키운다.금융기관간 업무영역은 1단계중 은행 증권 보험을 3대축으로 유지하되 다른 업종의 핵심업무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자회사를 통해다른 업종의 부수·주변업무를 확대허용한 뒤 2단계부터 겸업주의를 도입한다.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부응해 지급결제제도를 선진화하고 신용정보관리제도를 구축한다. 외환·자본거래자유화의 폭과 속도도 최대한 확대, 가속화한다는 것등이 그것이다.이같은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될 경우 우리 금융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지는 못할망정 동북아시아에선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게 재경원의 설명이다. 외형은 물론 질적으로도 커다란 발전을 볼수 있다. 금융의 고도화를 나타내는 금융연관비율이 94년 4.73%에서 2000년에는 5.7%로, 2020년에는 8.0%로 높아지는게 그것이다.금융의 국제화비율도 94년의 8.56%에서 12%, 25.0%를 기록하게 된다.금융전산망과 국가전산망의 연결도 이루어져 세금 납부실적, 부동산 보유현황, 운전 사고경력, 금융 거래실적등을 한눈에 알수 있게된다. 개인의 종합적인 신용을 금세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야심찬 계획이다. 금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신제윤재경원 서기관)는 자체평가가 나올만하다.그러나 이같은 자체 평가와는 달리 비판적 시각이 적지 않다. 지난20일 열린 공청회에서도 대부분이 총론에는 찬성하면서도 각론에들어가서는 갖가지 문제점을 제기한게 이를 말해준다. 미래 청사진을 그리는데 있어 핵심과제가 이해조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대부분유보됐다는게 가장 큰 문제다. 은행의 소유구조나 감독방식의 변경및 금융기관간 업무영역 조정이 대부분 논의에서 제외됐거나 구체적인 대안이 제시되지 못했다. 이해관계 충돌을 어떻게 조화시킬것인가는 어물어물 넘어갈 수 없다. 우회할 수 없으며 언젠가는 꼭맞닥뜨리게 마련이다. 지금 당장 어렵다고 해서 피하려고만 해서는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장기구상의 기본 추진방향은 맞는다. 그러나 앞으로 중요한1∼2년에 대한 구체적인 액션플랜이 없는게 가장 큰 문제다. 게다가 장기구상이라는게 정권이 바뀌면 휴지조각이 된다는 사실도 고려됐어야 한다』는 지적은 이래서 나온다. 좋은 것을 모두 다 할수는 없다. 백화점식 나열은 의욕은 좋지만 결실은 적을 때가 많다.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정책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면 공염불이 된다. 심할 경우 국민을 기만하는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악평까지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야심찬 계획」이 휴지조각이 되지 않도록 구체적인 액션 플랜을 짜는 것이 재경원과 금융연구원에 남겨진 과제다.★ 작업 뒷얘기21C 금융장기구상 작업은 지난해 7 월부터 시작된 신경제 (현재는21C)장기구상의 일부분으로 시작됐다. 그동안 5년단위로 이뤄지던경제계획을 더 이상 하지 말고 25년단위의 장기구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바꾸자는 한이헌 당시 경제수석(현 15대 국회의원당선자)의주장에 따른 것이다.이에따라 홍재형 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현 신한국당 청주상당지구당 위원장)이 95년7월 김영삼 대통령에게 작업추진계획을 보고했다. 추진 총괄반장에 KDI(한국개발연구원) 부원장이 임명돼 실무작업을 맡고 재경원 경제정책국이 가닥을 잡는 것으로 역할분담이 이뤄졌다. 금융장기구상은 22개 실무작업반중 하나로 시작된 것이다.홍 부총리는 윤증현 금융총괄심의관(현 세제실장)을 불러 금융산업의 장기구상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93년5월에 발표돼 금융정책의바이블로 여겨지던 「신경제금융개혁방안」이 97년으로 마무리됨에따라 그 뒤의 장기발전방안을 마련하라는 것. 곧바로 재경원 관료와 은행 증권 보험등 실무자와 대학교수등 29명으로 된 금융반을만들어 작업에 착수했다. 실무작업을 진두지휘한 것은 윤심의관과정해왕 금융연구원 부원장. 그 밑에서 실제 업무를 주도하는 역할은 윤석헌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과 신제윤 재경원 금융정책과 서기관이 맡았다.작업반은 『2020년이라는 허허벌판에 내팽개쳐진 기분』(신제윤 서기관)이었다. 변화속도가 급격한 시대에 1년후도 내다보기 어려운데 25년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거의 황당할 지경이었다는 것. 이같은 어려움이 금융반으로 하여금 금융연구원 교육문화회관 호암생활관등 장소를 옮겨 가며 자정까지 열띤 토론을 벌이게 하는 요인이 됐다.여기에 은행 증권 보험등 금융권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작업을 더어렵게 했다. 특히 은행과 증권은 「주도권」 싸움 양상까지 보였다는 후문이다. 은행의 유니버설뱅크론에 대해 증권이 푸대접론으로 맞섰다. 증권화 추세에 따라 증권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험도 가세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험의 수요와 시장이 커져 중요한 축을 형성할게 명약관화한데 보험은 여전히 변두리취급을 받는다는 주장이었다.이런 와중에 공동반장인 윤심의관이 세제실장으로 승진하면서 원봉희 심의관으로 교체되고 간사인 금융정책과장도 바뀌었다. 「내를건너는 도중에는 말을 바꾸지 않는다」는 속담이 무색해졌고 구상안 작업은 한동안 주춤거렸다. 이번 공청회안에 소유구조나 감독방식등 핵심과제가 포함되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 충분한 검토가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와 관련이 깊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반이 소장파 학자와 젊은 관료등 「미래지향적」으로 짜여져 이해조정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현재보다는 미래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 이해만고집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