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필자가 독일로 유학하여 경제학 공부를 시작한 학교는 베를린 자유대학교로서 통일되기 전 서베를린에 위치하고 있었다. 베를린 자유대학교는 전체학생수가 약 6만1천명으로 독일에서 뮌헨대학다음으로 학생수가 많은 대학이다. 베를린 자유대학교의 전신은 베를린대학(훔볼트대학)으로 독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간략히 학교현황을 살펴 보면 22개 학부에 80개의 학과가 설치되어있으며 약 1천여명의 교수가 재직하고 있다. 이중 공과계열의 학부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 공과계열은 서베를린에 있는 또 하나의 종합대학인 베를린공과대학교에 설치되어 있다. 베를린자유대학교는대체로 인문, 사회과학분야가 발달되어 있는 대학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수는 약 1백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이 중 상당수의 학생이 이러한 대학의 특성에 따라 정치학경제학 법학 등 사회과학분야를 전공하고 있었다. 경제학과는 경영학과를 포함해 학부제로 운영되고 5천여명의 학생이 경제학부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이 중 한국유학생은 11명이었다.그동안 필자가 한국의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은 체제 및 제도 등은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고 주로 경제변수의 상호인과관계만을 분석하는 실증경제학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경제학은윤리나 제도 등을 강조하는 규범경제학 성격이 강했다. 특히 베를린 자유대학교는 정치와 경제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정치경제학분야가 독일의 다른 대학에 비해 앞서 있었으며 이 분야의 세계적 석학들도 여러명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창의력·비판정신 배양또한 동구연구소는 뮌헨대학의 동구연구소와 함께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연구하는 양대산실로 명성이 나 있다. 필자는 유학후 처음1년간은 학교내에 설치된 어학코스를 이수했는데, 수료한 후에 치러야 하는 어학시험에 다행스럽게도 한 번에 통과할 수 있었다.만일 두번 이상 이 시험에 떨어지게 되면 「고향 앞으로 가야하는」비극을 맛봐야 한다.그리고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는 필자가 한국에서 이수한 학점을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지 않아 부득불 학사편입을 해야 했다. 그래서 1985년 2월까지 한 1년 반 가량 학사과정을 다시 이수, 학사학위(Vordiplom)를 받았다. 우리의 석사과정에 해당되는디플롬(Diplom)과정은 중요한 경제이론을 배우는 수업도 있었지만,주로 세미나식의 수업이 많았다. 세미나형태의 수업에서는 현실경제에 바탕을 둔 내용을 중심으로 주제발표와 열띤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토론식 수업이 생소했던 필자에게 토론중심의 수업은퍽 인상적이었으며, 이는 학생들에게 창의력을 배양하고 현실에 대한 건전한 비판정신을 길러 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도 경험하게 되었다.한편 유학시절 경제문제의 해결도 공부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였는데 필자는 학생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방학때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등을 하여 경제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방학기간 동안 열심히일하면 부족하나마 다음 한 학기 동안의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 석사공부를 시작할 쯤에는 필자의 석·박사학위논문 지도교수(Klaus Jaeger)의 연구조교로 일하게 되어 생활비를 충당할 수있었다. 박사과정중에는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몇군데 장학단체에장학금신청을 해 보았지만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독일교회에서 알게된 목사님의 추천으로 기독교재단으로부터 장학금도 받게 되어 넉넉지는 못했지만 경제적인 큰 어려움없이 공부를마치게 되었다.대부분의 학생이 독일의 대학이 갖는 고유의 학문적 특성을 배우러독일로 유학을 가지만, 필자의 경우 독일의 대학은 학비가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경제적인 장점도 독일로 유학을 간 또 다른 이유였다.통일 이후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학생들에게 주는 각종 혜택이 감소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필자의 유학경험을 기억해 보면 독일이라는 나라는 아직도 학비부담없이 사회가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누리며 아카데미즘이 무엇인지를 만끽할 수 있는 「학생들의 천국」이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