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유치 행사의 일환으로 거행된 슈투트가르트 축구팀과 한국국가대표팀간의 축구경기를 텔리비전을 통해 보고 있노라니 차붐이속한 레버쿠젠팀과 슈투트가르트팀의 홈경기가 펼쳐졌던 슈투트가르트 축구장에서 함성을 지르면서 차붐을 응원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독일을 떠나온지 벌써 7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노라니 나의 젊음이 머물렀던 독일생활의 기억들이 밀려와 내 가슴속에일렁거린다.내가 유학했던 슈투트가르트는 바덴 뷔르템베르크주의 수도로서 콜수상의 기민당이 계속하여 집권하고 있는 전통을 중요시하는 독일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롬멜 장군의 아들이 시장으로 재직중인당시 슈투트가르트는 독일 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서 이 곳에는세계 유수의 자동차회사인 벤츠, 포르셰를 비롯, 보쉬, SEL 등의거대 기업의 본사와 공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을 뒷받침하기위한 수많은 중소 기계공업체들이 밀집해 있다. 또한 미술대학인Kunst Akademie, 음악대학인 Musik Hochschule, 농과대학인Hohenheim 대학 등이 소재한 교육도시이기도 하다.슈투트가르트대학교는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1세가 1829년에 설립한 학교로서 초창기에는 기계공학과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화학공학과로 시작해 현재는 14개의 학부를 갖고 있는 종합대학교로 성장하였으며, 대학과 인적·물적 자원을 공유하고 있는 막스 프랑크연구소, 독일항공우주연구소, 국립재료시험연구원, 생산자동화연구소등의 국가 및 공공 연구소들이 학교내에 자리잡고 산·학·연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다.1984년 봄에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어학시험에 대비한 공개 강좌를듣던 중 금속활자는 독일이 세계최초로 발명했다는 어학원 교수의잘못을 지적하자 어학 담당교수는 나의 독일어 실력이 대단하다며어학시험 합격판정을 내려 주었다.◆ 유학초 1~2년 어려움 감내해야어학시험을 일찍 통과한 탓으로 학위과정 중에 부족한 나의 어학실력을 키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기계공학 관련 연구소를 찾아가서 교수님들과 인터뷰끝에 키가 크고 점잖은 노익장을과시하는 Dolezal교수를 만나 독일에서의 연구원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한국과는 완전히 상이한 교육체계를 갖고 있는 슈투트가르트대학교에서의 처음 1~2년은 독일식 사고에 적응해야 하고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만 하는 혹독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나는 많은 독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터키에서 나보다2년 먼저 유학온 Ali Benim은 선배로서, 다정한 친구로서 나의 독일생활이 활기 있고 의미 있는 생활이 되게 해 주었다.내가 속해 있던 열동력연구소는 화력발전소의 연소실내 연소해석과발전소의 계통제어, 그리고 연소로 인한 공해물질의 저감책 등을주로 연구하고 있었다. 연구소에는 대학내의 전기와 난방을 공급하는 화력발전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연구소 건물은 이 발전소를 지으면서 가설한 목조로 된 현장 사무소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구조가 튼튼하고 생활하는데 큰 불편이 없어 앞으로도 계속하여 사용할 계획이라 한다. 한국의 구조물 붕괴사태와는 좋은 대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연구소에서 식당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1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그들의 점심식사시간은 고작 35분 밖에 되지 않는다. 독일 사람들의생산성은 우리보다 배이상이 높지만 급여는 비슷한 수준에 도달한현재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우리 모두의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할 때인 것같다.독일 사람들은 무뚝뚝하여 사귀기 힘들지만 일단 마음을 주고 받는사이가 되면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 내가 경험한 그들은 성실하고 검소하며 만사를 철저히 점검하는 우직한 사람들이다. 성실과검소는 다음과 같은 그들의 생활신조 속에 깊숙이 배어있다.『Schaffe, Spare und Hausle baue(일하세, 저축하세, 그리고 집을지으세.)』독일유학을 생각하노라면 슈투트가르트 한글학교를 잊을 수 없다.광원과 간호사로 와서 현지에서 직업교육을 받고, 다양한 직업에종사하는 분들과 유학생의 자제들을 위해 신구철 박사 등이 설립한한글학교에 아내는 교사로, 나는 자원봉사자로 참가하였다. 한글학교를 통해 아이들은 한글교육을 통한 한국인의 얼을 계승하였으며,어른들은 서로의 친목을 도모하고, 생활의 정보를 주고받았다. 가끔씩 자리를 함께 한 야유회와 집으로 초대받아 먹던 갈비파티 등을 생각하면 그때가 한없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