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12월의 어느날. 김포공항 입국통로를 걸어나오는 스웨터차림의 한 젊은이. 사각의 안경이 눈두덩을 덮어 일견 어리숙해 보이는인상이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삽시간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고연방 카메라 셔터가 터진다. 「하버드대학 중퇴, 20세의 나이에 마이크로소프트(MS)사를 설립. 단 20년만에 1백억달러의 재산형성」.국내에서도 너무 유명해져 버린 빌 게이츠(41)의 방한이었다.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강연장은 남녀노소 인파로 들끓었다. 과연미래사회에 대한 「메시아적 일성」을 듣고 싶기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냉정히 평가해서 빌 게이츠는 훌륭한 프로그래머였으며뛰어난 협상술의 소유자였으나 그것만으로 그의 성공이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앞길에는 행운이란 요인도 많이 따라다녔다. 시장의 전개가 그에게 매우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더군다나 그의 생애는 오래전부터 언론이나 책자를 통해 많은 소개가 있었다.그럼 왜 빌 게이츠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그의 창업에 얽힌 얘기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까. 그것은 빌게이츠가 「가능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는 동시대인들에게,정보화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도전의지를 북돋워준다. 결국「빌 게이츠」는 한 자연인을 뛰어넘어 도전과 통찰력과 성공을 의미하는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진 것이다.그런 「빌 게이츠」들은 한국에도 있다. 어느날 혜성처럼 나타난약관의 경영인들. 예를 들면 이찬진(32)이나 허진호(35)같은 벤처기업인이다. 두 사람은 각각 한글워드와 인터넷이란 아이템을 들고나와 그 분야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두 사람에게는 기술과 아이디어가 밑천이었다. 중소기업이 살아남기 어렵다는 한국적 경영풍토속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힘든 과정을 이겨냈지만 그들의 성공은 기술과 아이디어를 생명으로 하고 있기에 또다른 새내기들에게 가능성과 희망으로 다가간다. 한글과 컴퓨터 사장, 아이네트기술 사장으로 착실히 성장하고 있는 두 사람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다.80년대후반 서울대 본부건물 2층의 전산실은 당시로선 접하기 힘들었던 유닉스(UNIX)환경의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 붙박이로 찾아오는 일군의 학생들이 있었고 이들중에 오늘날 범국민적 SW가 된 「 글(아래한글)」의 개발주역들, 이찬진 김형집우원식 등도 자리했다. 세 사람이 한글워드를 생각하게 된 것은 학생이라는 신분, 깔끔하게 인쇄된 보고서를 원하던 교수들의 취향과무관하지 않을 것이다.당시 한글워드로는 삼보컴퓨터의 보석글과 한글2000이란 신제품이있었지만 사용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한글2000의업그레이드(Upgrade)된 버전이 계속 나왔다면 글이 제작되지는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개발자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고 이찬진은개선점을 정리, 직접 새로운 한글워드를 개발하게 된다.허진호는 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졸업하고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전산을 전공한 정통 엔지니어출신이다.사실 일반인들에게는 인터넷이 알려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몇몇 관련학과와 KAIST에서는 연구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통신망이었다.박사학위를 마치고 삼보컴퓨터에서 근무했던 허진호는 통신분야에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학술대회를 통해 얼굴이 알려진 전문가였다.94년 한국에는 인터넷붐이 조성된다. 월드와이드웹(WWW)이란 새로운 형태의 인터넷환경이 만들어지고 전문가 허진호는 그 사업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94년 8월 삼보의 지원을 받아 인터넷접속서비스업체로 독립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벤처기업의 생명은 기술력이나아이디어에 수요를 찾아내는 통찰력이 덧붙여진다. 그리고 경영인으로 커가는 과정에서는 통찰력쪽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