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초정밀기술팀에 근무중인 L과장(32). 그는 최근 레코드가게에 들르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4살난 아들에게 고전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욕심으로 아동용 클래식 CD를 찾기 위해서다. 그가 음악이 뭔지도 모르는 아들을 위해서 CD를 사주기로 결심한데는 문화생활과 담을 쌓고 지냈던 어린시절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사실 그는 국어 영어 수학 등 주요과목을 잘해 서울대 공대 기계설계학과 석사과정까지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늘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다. 미대 출신의 부인과 결혼한것도 자신의 허전한 그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였던게 아니었나 가끔씩 반문해 보기도 한다. 이같은 생각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아들을 예체능학원에 보내겠다고 결심했다.L과장처럼 보다 나은 환경에서 자식을 키우고 싶은 욕심은 부모의인지상정. 그런만큼 자녀들을 교육시키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아니 대부분 과다할 정도로 투자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4세부터 영어교육 ‘붐’청담초등학교 4학년 백지원양이 미국계 컴퓨터 학원포스아르(FOURTH R)에 다닌지는 벌써 8개월. 그동안 컴퓨터로 그림그리기, 친구들과 통신하기, 생일카드만들기 등을 배웠다. 지난5월 어버이날에는 컴퓨터로 축하카드를 직접 만들어 부모님께 선물하기도 했다. 지금은 마우스로 특정 그림을 누르면 영어발음이 나오는 게임을 즐겨 하고 있다. 알아들을 때까지 몇번이고 누른다.만화로 돼 있어 재미도 있고 영어도 배울 수 있어 일석이조다. 또한 인터넷에도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학원선생님들의 도움으로포스아르 홈페이지에 야유회 때 찍은 사진과 간단한 소개서를 올렸다.지원이가 내는 수강료는 월 12만원. 일주일에 두 번 학원에 와서1시간씩 배우는 것치고는 결코 싼 금액이 아니다. 더구나 컴퓨터이외에도 영어 피아노 산수 미술 수영학원 등에도 다니므로 과외비로만 한달에 1백만원 가까운 돈을 까먹는(!) 셈이다.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서 보내지만 학부모들이 관심을 갖고 지도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포스아르의 조성종 기획부장은 『컴퓨터를다룰 줄 아는 학부모는 거의 없다』며 『언론이나 학교에서 컴퓨터니 인터넷이니 하고 얘기하니까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조기교육에 대한 열풍은 비단 컴퓨터에 국한되지 않는다. 내년부터초등학교 3학년 이상에서도 영어수업을 진행함에 따라 자연스레 영어조기교육붐이 일고 있다.양천구 목동의 키즈클럽. 세계적 영어학원 체인점인 영국 키즈클럽의 국내분원중 한곳으로 4세 이상의 유아들과 초중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신서초등학교 4학년인 지종현양은 지난해 10월 이곳 학원이 문을열면서부터 다니고 있다. 어머니가 다니라고 해서 학원에 온다는지양은 간단한 대화는 영어로 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5명이 함께하는 수업 때도 콩글리시가 아닌 유창한 미국식 발음으로 질문을던진다. 지양은 40명의 같은반 친구중에서 이같은 영어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35명이나 된다고 들려줬다.친구의 소개로 딸(8살)과 아들(7살)을 이곳 학원에 등록시키러 왔다는 주미현씨(33, 영등포구 신길동)는 자녀들의 수업이 끝날때까지 CCTV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전 큰애는 1년간 미국인강사를 초빙, 친구 4명과 함께 그룹과외를 시켰다고 말했다. 주씨는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일찍부터 정확한 발음을 구사할수 있도록 데려왔다』며 『가계의 부담을 느끼면서까지 투자하지만효과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한다』고 말했다.최근 각광 받는 영어 컴퓨터 이외에도 미술 음악 발레 등은 일찍부터 학부모들의 관심을 끌어 왔다.◆ 태아음악 CD등 CD-ROM학습 인기서울시 노원전철역 부근에 위치한 「정상노 무용학원」. 국립무용단 출신의 원장이 지난 87년 문을 연 이곳에도 일찍부터 무용을 배우러 온 아동들로 붐빈다. 전체 80여명의 수강생중 80%가 발레를,20%가 한국무용을 배운다. 유아발레반의 낭성희(5)어린이도 일주일에 네번씩 오전 10시부터 1시간 동안 발레를 배운다. 균형있는 몸매로 가꿔 주려는 엄마의 욕심으로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싫증내지않고 재미있게 배운다. 다리를 들어 균형을 잡는 등 6개월 배운티를 곧잘 낸다. 싫증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할거라고 얘기한다.발레강사 구외숙씨는 『부모님들이 무용을 통해 자녀들 특히 여자어린이들의 체형을 아름답게 가꾸거나 비만방지를 기대하는 것 같다』고 수강동기를 분석했다.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에 사는 5살바기 김희연 어린이. 희연이의 하루 일과도 어른 못지 않게 바쁘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1시30분까지 신림4거리에 위치한 「경현속셈학원」에서 미술과 속셈을 배운다. 20여명의 자기또래들과 놀다가 집에 오면 일주일에두번씩 수영학원과 피아노 학원에 가야 한다.희연양의 어머니 이보경씨(31)는 『대우자동차 대리로 근무하고 있는 남편 월급으로 속셈학원 8만원에다 수영(6만원) 피아노(5만원)등 매월 19만원을 지출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하소연하면서도 『유치원입학전까지 최소한 음악 미술 한두개는 가르치는게일반화됐기 때문에 보낸다』고 말했다.조기교육에 대한 열기는 줄기차게 계속된다. 태교음악용 각종 CD가웅진 SKC 등에서 판매된다. 지난해 태아음악CD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잘 팔린다고 한다. 또한 PC의 대량보급에 따라CD-ROM을 이용한 학습도 최근 인기를 더해 가고 있다. 웅진 미디어CD사업부 멀티미디어개발팀의 노재신씨는 『지난해부터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영어발음도 나오는 꼬마크레용란 제품을 시판하는데 매월 5천개 정도 나간다』며 『PC의 대량보급과 비교적 적은 투자로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초등학교 입학전 과도한 조기교육열에 대한 문제제기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경제적 정신적 압박을주는 조기교육열을 진정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검토돼 온 것도사실이다. 최근 성행하는 컴퓨터나 영어교육이 외국문화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나 진작 필요할 나이에 싫증을 낼 수도 있다는 교육적측면의 비판도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전의 자녀에게 매월 수십만원의 학원비를 지출하는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특히 십만원 이상의 고액을 주고 다니는 어린이와 몇만원이 없어 학원도 못가는 아동간의 빈부격차가 몰고올 후유증을 우려하는 주장도 일고 있다.이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5살 딸을 둔 임사임(31)씨의 말이 더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교육비도 교육비지만 마음껏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음악 영어 컴퓨터학원으로 쫓아다녀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냥애들이 좋아하는 대로 놔두고 싶지만 이웃 애들이 무엇 무엇을 배운다는 얘기를 들으면 불안해지는 것이 부모된 심정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