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업 리스크 해소하고 실리 챙긴 ‘보톡스 합의’
LG에너지솔루션·SK이노베이션 배터리 분쟁에도 통할까

[비즈니스 포커스]
LG에너지솔루션 오창 전기차 배터리 생산라인에서 연구원들이 배터리를 점검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제공
LG에너지솔루션 오창 전기차 배터리 생산라인에서 연구원들이 배터리를 점검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제공
LG에너지솔루션(전 LG화학 배터리사업 부문)과 SK이노베이션 간 전기차 영업 비밀 침해 소송에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LG에너지솔루션의 손을 들어줬다. ITC는 2월 10일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용 리튬이온 배터리에 대해 10년간 미국에서의 생산과 수입을 금지한다”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다만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는 포드와 폭스바겐에 한해서는 각각 4년, 2년의 유예 기간을 뒀다. 고객사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조치로 풀이된다. 최종 판결에 대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심의 기간인 60일 내 합의하거나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ITC 명령을 뒤집을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은 LG에너지솔루션과 합의하지 못하면 3조원 이상을 투자한 미국 사업을 불명예스럽게 철수해야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ITC의 최종 판결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합의금 규모에 대한 양 사의 견해차가 여전히 크다는 점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3조원 이상을, SK이노베이션은 수천억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연구원이 자사 배터리를 선보이고 있다. /SK그룹 제공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연구원이 자사 배터리를 선보이고 있다. /SK그룹 제공
급전 필요한 LG, SKIET 지분 받을까
업계에서는 SK이노베이션이 자회사(SK아이이테크놀로지) 지분과 소송 비용 등을 합쳐 5000억원 미만을 제시했다는 말이 나온다. 코나EV 리콜 비용으로 인해 LG에너지솔루션이 합의금을 더 높일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화재가 잇달아 발생해 리콜 조치를 진행 중인 코나EV의 1조원대 리콜 비용에 대해 LG에너지솔루션이 현대차와 비용 분담률을 3 대 7로 최종 합의하면서 LG에너지솔루션도 급전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여전히 합의에 난항을 겪는 가운데 배터리 분쟁과 판박이라고 불리는 메디톡스와 대웅제약의 ‘보톡스 분쟁’ 합의 방식에 관심이 쏠린다. 메디톡스와 대웅제약의 보톡스 분쟁은 2016년 10월 메디톡스가 “대웅제약의 보톡스 제품 ‘나보타(미국 제품명 주보)’는 우리 보톡스 균주를 훔친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작됐다.

이후 양 사는 한국에서 소송전을 벌이다가 메디톡스가 2019년 1월 미국 파트너사인 엘러간과 공동 원고로 대웅제약과 대웅제약의 미국 파트너사인 에볼루스를 ITC에 공식 제소하면서 미국에서도 소송전을 벌이게 됐다. 배터리 분쟁처럼 보톡스 분쟁도 수년간 수천억원의 소송 비용을 들여 미국 ITC에서 벌인 소송으로 영업 비밀 침해 여부를 다툰 것도 공통점이다.

ITC는 2020년 7월 대웅제약의 기술 도용을 일부 인정해 나보타의 미국 수입을 10년간 금지한다는 예비 판결을 내렸다. 같은 해 12월에는 예비 판결(10년간 영업 금지)보다 제재 기간이 단축된 나보타의 미국 수입을 21개월간 금지한다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ITC가 대웅제약 측의 제조 공정 도용 등의 혐의는 일부 인정했지만 메디톡스가 주장한 보툴리눔 균주는 영업 비밀이 아니라고 판단하면서 업계에서는 ‘절반의 승리’에 그쳤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메디톡스처럼 합의금·로열티·지분 취득 방식으로 합의 가능성
보톡스 균주 도용을 둘러싸고 6년 동안 이어진 메디톡스와 대웅제약의 소송전은 ITC 최종 판결을 계기로 2021년 2월 ‘3자 합의’가 이뤄지면서 일단락됐다. 메디톡스는 대웅제약이 만든 보툴리눔 톡신 제제인 나보타의 미국 판매에 대해 자사의 미국 파트너사인 엘러간(현 애브비), 대웅제약 파트너사인 에볼루스와 3자 합의 계약을 했다. 메디톡스와 엘러간은 미국에서 나보타 판매·유통 권리를 에볼루스에 부여하되 에볼루스는 합의금(약 380억원)과 나보타 매출에 대한 로열티를 메디톡스와 엘러간에 지급한다는 것이 합의안의 핵심이다.

메디톡스는 에볼루스 주식도 16.7% 취득해 2대 주주가 됐다. 한국 소송에 대한 불씨까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지만 합의가 이뤄지면서 ITC가 나보타에 대해 내린 미국 판매 금지 결정과 미국 내 소송 등이 모두 철회됐고 사실상 에볼루스와 대웅제약의 미국 시장 리스크도 모두 해소됐다. 메디톡스도 에볼루스에서 로열티를 받게 돼 결과적으로 양 사 모두 실리를 챙겼다는 분석이다.

보톡스와 배터리 시장 규모 차이가 크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업계에서는 배터리 분쟁에서도 SK이노베이션이 합의금으로 현금을 비롯해 자회사 지분 또는 로열티를 LG에너지솔루션에 넘길 가능성이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분리막 제조사로 올해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가 유력 후보다.

SK이노베이션은 SK루브리컨츠와 SK종합화학의 지분 매각도 추진 중이다. 자회사 지분 매각과 SKIET 상장을 통해 5조원 규모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SK이노베이션은 자회사 지분 매각에 대해 배터리 등 성장 재원 확보 차원이라고 일축하고 있지만 마침 이 금액이 LG에너지솔루션이 원하는 합의금 규모와 맞아떨어져 업계에서는 SK이노베이션이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LG에너지솔루션은 SK이노베이션과 합의금 협상이 진행된다면 합의금 지급 방식으로 일시금, 로열티 배상, 지분 취득 등 다양한 방법을 수용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합의금 배상 방식에 대해서 메디톡스와 대웅제약 사례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합의 방식과 관련해 SK이노베이션도 메디톡스·대웅제약의 사례를 이미 파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보톡스 분쟁 관련 메디톡스의 국내 소송 등에 폭넓게 관여한 법무법인 화우의 지식재산권(IP)팀이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분쟁 관련 국내 소송에서는 SK이노베이션을 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LG에너지솔루션의 주장대로 미국 연방비밀보호법에 따른 손해 배상 산정 기준에 따라 합의금에 징벌적 손해 배상까지 포함하면 LG에너지솔루션이 요구할 수 있는 합의금 규모가 5조원 안팎이 될 것으로 보인다. 크레디트스위스는 ITC의 최종 결정이 나온 뒤 내놓은 보고서에서 “두 회사의 합의금이 5조원을 넘을 것으로 보이고 합의가 안 되면 LG에너지솔루션이 유럽에서도 소송을 진행할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1공장 전경 /SK이노베이션 제공
SK이노베이션이 미국 조지아주에 짓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1공장 전경 /SK이노베이션 제공
SK, 백악관에 SOS…막판 뒤집기 총력전
ITC 최종 판결로 불리한 상황에 놓인 SK이노베이션은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에 희망을 걸고 있지만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대통령이 ITC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 무역 분쟁에서 미국이 지식재산권 보호를 강조해 온 만큼 영업 비밀 침해에 대해 엄격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ITC는 3월 5일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영업 비밀 침해 사건 최종 의견서에 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의 영업 비밀 22개를 침해했다고 명시했다. ITC는 SK이노베이션이 영업 비밀 침해 없이는 독자적으로 제품을 개발하는 데 10년이 걸릴 것으로 판단해 미국 수입 금지 조치 기간을 10년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은 “ITC가 영업비밀 침해라고 결정하면서도 여전히 침해됐다는 영업비밀이 무엇인지, 어떻게 침해됐다는 것인지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최근 백악관에 배터리 분쟁에 개입해 달라고 정식 요청했다. 영업 비밀 침해를 이유로 ‘미국 내 수입 금지 10년’ 명령을 내린 미 ITC의 결정이 SK이노베이션이 조지아 주에 짓고 있는 전기차용 배터리 공장 건설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며 ITC 제재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달라는 내용이다.

SK이노베이션은 의견서를 통해 공장이 완공되면 2023년 2600여 개에서 2025년 3400여 개의 일자리를 추가로 창출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하기도 했다. 또한 거부권 행사가 이뤄지지 않으면 공장을 포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내비쳤다. SK이노베이션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인 포드와 폭스바겐에 배터리를 공급하기 위해 약 3조원을 들여 미국 조지아 주에 배터리 제1·2공장을 짓고 있다. 제1공장은 2022년 1분기, 제2공장은 2023년 1분기부터 각각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LG도 미국 선제 투자로 맞대응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제품의 미국 생산과 수입을 금지하는 ITC 명령이 그대로 실현되면 사실상 SK이노베이션이 수년간 공들였던 미국 투자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에 SK이노베이션은 ITC 명령을 뒤집기 위해 막판 총력전을 벌이는 모습이다.

SK이노베이션은 그동안 미국 배터리 공장 건립뿐만 아니라 현지 학교에 장학금 기부와 의료 기관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지원 비용 등 지역 사회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이어 왔다. SK이노베이션 미국 법인은 2020년 6월 미 국무부가 발표한 ‘투자 우수 기업’ 사례로 선정되기도 했다.

LG에너지솔루션도 배터리 분쟁 승소를 기점으로 미국에 선제 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맞대응에 나서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최대 자동차 업체인 제네럴모터스(GM)와 오하이오주에 약 2조6000억원을 들여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는데 테네시주에 두번째 전기차 배터리 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정치권의 입김이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합의에 막판 변수로 작용할지 주목된다. 조지아 주지사와 상원의원 등 정치인들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SK이노베이션의 공장이 미치는 경제적 파급효과를 고려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ITC 판결 이후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 주지사는 성명을 통해 “ITC 결정으로 조지아에서 진행되는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공장 건설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며 바이든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요청했다. 미 교통부 부장관 지명자인 폴리 트로튼버그도 최근 상원 상무·과학·교통위원회 인준 청문회에 출석해 ITC의 배터리 분쟁이 바이든 행정부의 녹색 교통 목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겠다고 밝혔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